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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표절까지… 고교생이 쓴 논문 72편 부실 학술지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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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논문도 무조건 실어주거나 공신력을 의심받는 부실한 국제 학술지·학회 39곳에 국내 고교생이 원저자(original author)인 논문 72편이 등재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학생 저자들 소속은 모두 자율형사립고 또는 외국어고∙과학고∙영재고 등 특수목적 고등학교였다. 학생들 논문이 부실 학술지에 게재되는 비율도 해마다 높아져, 해외대학 입학을 노린 ‘부실 스펙 쌓기’의 결과란 지적이 나온다.
15일 미디어 스타트업 언더스코어 강태영 대표와 미국 시카고대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강동현씨 연구결과 및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전 세계 '약탈적 학술지' 39곳에 최근 20년간 국내 24개 고교생 149명의 해외논문 72편이 실린 것으로 확인됐다. 약탈적 학술지 39곳은 국제학술지영향력평가지표(SRJ) 및 미국∙중국 학술기관 등이 작성한 전 세계 부실 학술지·학회 명단을 근거로 분류된 곳이다. 약탈적 학술지는 돈만 내면 무조건 논문을 싣고 출판윤리를 어기는 곳이고, 부실 학술지·학회는 편집정책이 불명확하거나 동료심사 없이 논문을 받아주는 단체다.
강 대표 등은 교육부가 운영하는 '학교알리미'에 등록된 고등학교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이 속한 학교 등 전국의 국제학교 6곳은 포함되지 않았다. 국제학교 학생 95% 이상이 해외대학에 진학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국제학교 학생이 등록하는 해외논문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킬 경우 약탈적 학술지에 실리는 고교생 논문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학회∙학술지 분류에 활용된 미국의 '빌스 리스트’와 중국과학원의 '약탈적 저널 및 학술단체 리스트'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국내 연구자를 대상으로 운영 중인 건전학술활동 지원시스템도 참고하는 부실 학회∙학술지 판별 자료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교생 논문이 실린 학술지 가운데 약탈적 행태가 가장 심각한 곳은 네덜란드 학술지 ‘프로시디아-사회 & 행동과학(Procedia-Social and Behavioral Sciences)’이다. 국내 자사고 학생 2명은 2015년 이 학술지에 각각 ‘한국 로봇 교육의 결과와 전망(results and outlooks of robot education in republic of korea)’과 ‘한국 청소년의 극단적 선택 인식에 관한 연구(a study on adolescent suicide ideation in south korea)’라는 논문을 등재했다. 본보가 표절검증 프로그램 ‘카피킬러’로 확인한 결과, 두 논문의 표절률은 각각 99%와 89%에 달했다. 베낀 논문이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국제 학술 저작물’로 둔갑한 셈이다. 해당 학술지는 2018년 이후 논문 등재를 중단한 상태다.
스위스의 화학분야 국제 학술지 ‘몰리큘스(molecules)’에도 외국어고와 자사고 학생 3명의 논문이 실려 있다. 이 학술지는 중국과학원 등에 의해 약탈적 학술지로 분류돼 있다. 강태영 대표는 “이 학술지는 심사 과정을 최소화하고 편당 게재료 수백만 원을 받는 곳”이라고 했다. 몰리큘스의 논문 1편당 게재료는 300만 원(2,300 스위스프랑)이다.
고교생 논문을 받아주는 부실한 국제 학술지·학회 39곳 중에는 한국에 소재를 둔 전자 분야 A학회도 있다. 이곳은 2009~2018년 자사고와 특목고 학생의 논문 15편을 등재했다. 학회 대표 B씨는 고교생 논문을 받아준 경위에 대해 “학회 구성원들이 ‘세계적 수준의 논문은 아니지만 컴퓨터기술의 대중화와 발전 방향에 대해 잘 정리했다’고 평가했고, 학생들이 영어도 잘해서 통과시킨 기억이 난다"고 밝혔다. B씨는 “우리 학회는 세계적 전자기술 학회 IEEE와 협력해 운영 중이고, 공정한 논문심사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 산하의 한 학술기관은 A학회에 대해 “학술 행사의 논문 발표 관련 정보가 부재하고, 세부 정보도 없다"며 "지난 23년간 똑같은 슬로건으로 학술행사를 여는 등 일반적이지 않은 행태를 보이는 곳"이라고 말했다.
약탈적 학술지∙학회로 분류한 곳에 논문을 많이 등록한 고등학교 중에선 해외대학 입시반을 운영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 수도권 소재 C자사고의 ‘학생 저자’ 66명은 2007~2020년 총 30편의 논문을 부실 국제 학술지 12곳에 등재했다. C자사고는 2005년 개교 이래 현재까지 해외대학 입시반을 꾸려 2,000여 명을 합격시켰다고 홍보하고 있다. 지방 소재 D자사고 또한 소속 학생 6명이 2010년부터 10년간 해외논문 6편을 부실 학술지 6곳에 게재했다. D자사고는 ‘국제진학상담실’을 설치해 해외대학 입시를 관리하고 있다.
고교생이 약탈적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이유는 무엇일까. 2020년까지 10년간 고교 3학년 담임을 했던 자사고의 한 현직 교사는 “해외대학 입학을 위한 스펙 쌓기 일환으로 심사 없이 받아주는 학술지에 투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 있는' 고교생 논문도 많이 봤다고 말했다. 그는 “논문의 독창성이나 질적 수준이 의심스러워도 학생이 담당교사에게 '논문 실적을 추천서에 반영해달라'고 요구하면 거절하기가 어렵다”며 “학생들은 학술지 등재 실적을 바탕으로 해외대학 입학 때 장학금 등 혜택을 노리고 (약탈적 학술지에) 논문을 싣기도 한다”고 전했다.
별다른 제재가 없다 보니 고교생이 부실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비율은 계속 늘고 있다. 강 대표 등이 최근 20년간 국제 학술지에 등재된 고교생 논문 중 부실 학술지·학회에 등재된 논문이 차지하는 비율을 분석한 결과, 2010년 이전엔 10% 미만에서 2020년 들어 20%대로 높아졌다.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은 “미국 대학들은 부실한 논문이 약탈적 학술지에 게재되는 현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국내 학생들의 이 같은 행태는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학부모들은 불안감을 부추기는 사교육업체의 주장에 휘둘리지 말고 정확한 입학 정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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