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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 최대 69시간제' 추진에 어수선한 판교…"등대 또 켜지나" 걱정 vs "숨통 트일 것" 기대 엇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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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판교 등대, 구로 등대 시절이 올까 두렵습니다."
게임업계 개발자 A씨
정부가 주 52시간 근무제 개편을 추진하겠다고 예고하자 정보통신(IT) 업계가 몰려 있는 경기 성남시 판교가 벌써부터 시끄럽다. 과거 주 52시간제 도입 전만 해도 게임·IT 회사는 야근을 밥 먹듯 하면서 회사 사옥에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등대'라는 슬픈 이름을 얻기도 했다. IT 업계 직원들이 정부의 생각대로 근무제가 바뀌면 크런치 모드(Crunch Mode,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 야근과 특근을 반복하는 것)가 부활할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는 이유다. 반면 주 52시간제가 도입된 지 4년이 지났고, 그사이 개발자들의 몸값도 치솟으면서 기업들이 쉽사리 초장시간 근무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회사 측은 보다 유연하게 인력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 기대를 하면서도 직원들의 반발과 그로 인해 생길 갈등을 걱정하고 있다.
16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12일 미래노동시장연구회(연구회)가 발표한 노동시장 개혁 권고안을 검토해 내년 상반기까지 입법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권고안은 현행 주 52시간제를 업종 및 기업 특성에 맞게 유연화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주 52시간제는 기본 40시간에 최대 12시간까지 더 일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연구회는 연장 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주'에서 '월·분기·반기·연'으로 다양화하자고 제안했다. 만약 이것이 현실화한다면 일주일에 최대 69시간 일하는 게 가능해진다.
과거 크런치 모드를 경험했던 IT 업계 직원들은 걱정부터 앞선다고 했다. 15년 차 게임 개발자 A씨는 "개편안 뉴스를 보고 신작 출시 전 회사에 간이침대와 텐트를 두고 한 달 넘게 집에 못 가고 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며 "주 52시간제 도입 후 그나마 살 만해졌는데 다시 힘들었던 과거로 돌아갈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실제 주 52시간제 도입 이전 일부 게임사에서 프로그래머가 연이어 돌연사했는데, 이를 두고 장시간 근무에 따른 과로사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다.
특히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반 출생) 직원은 크런치 모드에 대한 거부감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임직원의 평균 연령이 낮은 IT 업체는 주 52시간제를 실시하고 나서 입사한 직원들이 많다. 2년 차 IT 개발자 B씨는 "주 69시간 근무가 현실이 된다면 이직을 고려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며 "차라리 몸이 갈리더라도 스톡옵션을 주는 스타트업으로 옮겨 한 방을 노리는 사람들이 꽤 생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실 게임회사들은 그동안 IT 업계의 업무 특성을 고려해 주 52시간제를 바꿔 달라고 요구해왔다. 이 때문에 정부의 개편안이 현실이 되면 신작 출시나 대규모 업데이트를 앞두고 지금보다 더 유연한 근무제를 도입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내놓고 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도 2019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주 52시간제로 업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중국은 6개월 내 새로운 프로젝트가 나오는 반면 우리나라는 생산성이 뒤처져 1년이 지나도 신작이 나오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실제 엔씨소프트의 신작 게임 'TL'은 당초 올해 말 출시가 예고됐지만, 내년 상반기로 늦춰졌다.
한 게임업체 인사 담당자는 "개발이라는 것은 고숙련 인력이 투입되는 만큼 짧은 시간에 새 인력을 뽑아 발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다"며 "회사의 모든 개발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만이라도 야근이 가능해질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선 개발자들의 우려처럼 주 69시간이 남발되지는 않을 것이란 주장도 내놓는다. 개발자 품귀 현상이 이어지면서 지난해부터 판교 IT 기업들은 개발자들에게 주 30시간대 근무제나 평생 재택근무 등의 당근책을 경쟁적으로 내밀었다. 카카오게임즈는 지난해부터 격주마다 주 4일 근무제를 시행할 정도고, 배달의민족 운영사 우아한형제들은 올해 1월부터 주 32시간으로 근무 시간을 줄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회사가 주 69시간을 강제할 경우 실력있는 개발자들은 대규모로 회사를 떠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노동계에서는 근무시간 유연화 반대와 함께 포괄임금제 폐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포괄임금제란 일하는 형태나 업무 특성상 추가 근무 수당을 정확히 집계하기 어려운 경우 노사 당사자 사이의 약정으로 실제 근무한 시간과 관계없이 매달 연장·야간·휴일근로 시간 등을 정해두고 이에 상응하는 고정 수당을 주는 임금 지급 계약 관행을 말한다. 노조에서는 포괄임금제에 따라 회사가 초과 수당 지급 의무가 없다 보니 임직원들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포괄임금제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근무제가 달라질 경우 '공짜 야근'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2019년 한국경제연구원이 매출액 상위 600대 기업 중 195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포괄임금제를 도입하고 있는 기업이 57.9%에 달했다. 연구회도 권고안을 통해 포괄임금제에 대해 오·남용을 막을 수 있는 종합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정부에 조언했다.
오세윤 화섬식품노조 IT위원장은 "포괄임금제 폐지 없이 초과 근로를 특정 기간에 몰아서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은 크런치 모드를 전 산업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어 "그나마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노동 시간을 줄여 가던 흐름을 막는 것"이라며 "또다시 대한민국을 '초(超)과로사회'로 되돌리겠다는 것이므로 절대 진행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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