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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돼 비석만 남은 공동묘지...섬나라 피지는 '천국'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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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전쟁의 최전선에 태평양 섬나라들이 있습니다. 해발 고도가 1~3m에 불과한 작은 섬나라들은 지구 온난화로 생존을 위협받습니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해변 침식과 해수 범람이 삶의 터전을 빼앗은 지 오래입니다.
태평양 섬나라 14개국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전 세계 배출량의 1%가 안 됩니다. 책임 없는 이들이 가장 먼저,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부정의이자 불공정입니다. 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에 당신의 책임은 없을까요? 한국일보는 키리바시와 피지를 찾아 기후재난의 실상을 확인하고 우리의 역할을 고민해 봤습니다.
"저는 이 마을에 남는 마지막 사람이 될 거예요. 가족과 이별해도 괜찮아요. 아무도 남지 않으면 땅 주인이 마을을 팔거나 개발해서 우리 가족의 오랜 역사를 다 파괴할 테니까요."
남태평양 섬나라 피지 비티레부섬 남부 세루아주(州)의 토고루 마을. 이달 6일(현지시간) 만난 마을 주민 바니 단(56)은 바다에 잠겨 수면 위로 머리만 솟은 가족 공동묘지의 비석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바니가 어렸을 땐 마을 풍경이 달랐다. 해수면 상승 탓에 파도가 마을 쪽으로 전진하며 수십 미터 폭의 땅을 수몰시켰다. 이젠 썰물 때나 집터를 볼 수 있다.
고향의 소멸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한다는 착잡함이 바니의 목소리에 묻어났다. "재난에 처하면 사람들이 생각을 하잖아요. 어떻게 해야 하나. 저한텐 선택지도 없어요. 매일 고민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아요."
피지는 2020년 국제 평가기관 저먼워치가 선정한 '세계에서 10번째로 가장 기후변화에 취약한 나라'다. 바니의 고민은 피지인 모두의 고민이다. 고급 호텔과 리조트가 즐비한 평화로운 휴양지로만 알려진 피지의 현실이기도 하다.
피지 재난의 결정적 원인은 지구 온난화다. 지난해 세계기상기구(WMO)는 피지가 위치한 남서태평양 일부 수온이 지구 평균보다 3배 빠른 속도로 오른다고 경고했다. 급격한 수온 상승은 산호와 어장을 파괴한다. 해수면을 상승시켜 삶의 터전을 앗아간다.
섬나라를 주기적으로 강타하는 열대 사이클론(강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열대성 폭풍)은 치명적이다. 지구가 뜨거워져 사이클론이 빨아들이는 에너지가 증가하자 사이클론의 파괴력도 커졌다. 2016년엔 남반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이클론 '윈스턴'이 피지를 휩쓸어 44명이 숨지고 피지 국내총생산(GDP) 3분의 1에 달하는 14억 달러(약 1조7,290억 원) 피해가 발생했다. 관광 자원인 해변도 엉망이 됐다.
사이클론 등급(1~5등급)은 풍속을 기준으로 매긴다. 최고인 5등급(최대 풍속 157mph 이상·시속 253㎞에 해당)짜리 사이클론이 피지를 덮친 건 당시가 처음이었다. 이후 피지를 통과하는 사이클론의 강도는 무서운 속도로 커지고 있다. 2020년엔 5단계 사이클론인 해럴드와 야사가 연달아 닥쳤다.
90만 피지 인구의 75%가 바다에서 5km 이내 해안 지역에 거주한다. 대부분의 인구가 사이클론과 해수 범람, 해변 침식의 위험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채 살아가는 셈이다.
바니의 가족은 1800년대에 토고루에 정착해 다섯 세대째 살고 있다. 주민이 대부분 떠난 토고루엔 바니를 포함한 20여 명만 남았다. 빈집이 많아 한낮인데도 적막했다. 비가 퍼붓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주민들은 파도와 폭우에 내쫓겼다. "2010년대부터 1년에 1, 2번씩 발생하는 '킹 타이드'(밀물과 썰물의 파고 차가 연중 가장 높아지는 현상)와 일반 밀물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할 만큼 파도의 크기가 커졌다"고 바니는 말했다. 대형 파도는 마을을 초토화시킨다. 갈수록 길어지는 우기도 근심거리다. 과거 1월 우기(피지의 우기는 11~4월)엔 3, 4일 비가 오면 1, 2일은 맑았다지만, 기자가 방문한 6일엔 하루도 그치지 않고 2주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니는 "2주에 한 번 이상 마을이 침수돼 도로가 끊긴다"고 했다. 마을에 갇혀 학교도, 회사도 갈 수 없다. 물이 빠지는 데 보통 3, 4일이 걸린다. 바니는 "마을이 한 달에 반은 물에 잠겨 있는 셈"이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지난해엔 홍수 피해를 줄여 주던 맹그로브 숲이 파괴됐다. 땅 주인이 뉴질랜드 개발자에게 숲을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물가의 맹그로브 나무는 가늘고 많은 뿌리로 흙을 꽉 잡아 침식을 줄이고 유속을 늦추는 자연 방파제다. 숲은 파헤쳐진 흙과 잘려 나간 맹그로브 뿌리로 난장판이었다.
한때 1만2,000평에 달했다는 토고루 해변은 이제 더 깎일 것도 없는 수준이다. 세계자연기금(WWF)에 따르면 토고루 해변은 1년에 1.5m씩 유실된다. 모래가 사라지자 마을의 생계가 걸린 코코넛 나무가 쓰러져 말라 죽기 시작했다. 코코넛 나뭇잎으로 바구니를 만들어 팔고, 열매는 먹거나 가공하고, 줄기는 땔감으로 썼지만, 이젠 아무 것도 없다.
단 가족은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바니의 형제 두 명과 사촌 여섯 명도 전부 인근 도시로 이사를 갔다. 사촌인 니콜라스 단(26)은 수도 수바의 리조트에서 일하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해고돼 돌아왔다. 니콜라스는 "다시 일자리만 얻으면 수바로 나가고 싶다"고 했다. "여기는 집세 걱정이 없어서 좋은데, 넷이나 되는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떠나야 한다"고 했다.
바니는 "방파제를 지어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외면한 피지 정부가 원망스럽다. 단 가족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파제 건설을 요구했다. 프랭크 바이니마라마 전 총리 재임 시절인 몇년 전 정부 인사들이 방파제 건설 비용을 계산해 보겠다며 마을을 찾아온 게 정부가 보인 성의의 전부다. 이후로는 감감무소식이다.
희망을 놓은 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부가 어떤 기후재난 대응 정책을 내놓는지, 예산은 얼마나 배정하는지 끈질기게 지켜보고 있다. 최근 뉴질랜드 정부가 피지 기후재난 취약 마을 이주 프로젝트에 200만 달러(약 24억 원)를 지원한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바니는 지쳐보였다. "먼 한국에서 와 줘서 고맙다"고 기자의 어깨를 두드리면서도 기사가 나간 뒤에도 달라질 것을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정부와 언론에 수없이 말했지만, 변한 게 없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 스스로 할 것이 있긴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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