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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4·19, ‘역사적 화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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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148번째 생일이던 26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에 50여 명의 원로가 집결했다. 중절모 옆 백발이 성성한 이들은 4·19혁명 현장에 참여한 주역들이다. “독재자 이승만 물러나라”고 외쳤던 이들이 63년 만의 뜻깊은 역사적 화해에 나섰다고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훈훈한 장면이 ‘이승만 재평가’ 시너지로 이어질 수 있을까.
□ 4·19가 ‘의거’에서 ‘혁명’으로 격상돼 정당한 대우를 받게 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민주화가 이뤄진 김영삼 정권 때다. 이전까지 ‘4·19 주체들의 변절’이란 화두가 끊이지 않았다. 1972년 유신 직후 4·19세대 45명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자강 확립을 위한 영단이다. 10월 유신은 4·19 정신의 계승”이라고 지지선언에 나섰다. 일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명하는 유정회(임기 2년) 국회의원으로 출세가도를 달렸고, 일부는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5공화국 국정방향과 4·19 정신은 일치한다”며 민정당 국회의원이 됐다.
□ 이승만은 재평가돼야 마땅할 것이다. ‘외교천재’로서 ‘평화선’을 선포해 독도를 한국 땅으로 못 박은 인물이다. ‘벼랑 끝 외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4·19 원로인 한 이승만 전문가를 취재했을 때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하려면 ‘예측불허성’이 기본전략이다. 이승만을 북한이 벤치마킹한다”고 설명한 대목이 생각난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압박하며 ‘반공포로 석방’ 외교쿠데타로 연합국 수뇌부를 혼돈에 빠뜨렸다.
□ 이승만기념관 건립이 추진되면서 ‘건국절’ 논란이 다시 주목된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역사적 패륜으로 낙인찍혀 오랜 시간 음지에 계셨다”며 “누가 건국 대통령을 왜곡했나”라고 문제 제기했다. 보수와 진보의 이 논쟁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1948년 이승만 정부 수립 중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는 문제다. 거인을 어느 한 면만으로 명쾌하게 설명하긴 어려운 일이다. 시대정신 변화에 따라 영웅에 대한 평가는 반전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역사의 정치화’가 또 재현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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