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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지 않아도 괜찮다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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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귀찮은 경쟁 또는 사치'(연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권'(결혼), '인생이 저당 잡힐까 두려운 고통이자 부담'(출산).
이 땅의 20대 청춘들이 새롭게 써 내려간 연애, 결혼, 출산의 정의에는 절망적 단어들이 가득했다. 인구 감소 위기와 대응책을 조명한 창간기획 '절반 쇼크가 온다' 취재를 위해 만난 청년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이랬다. "연애, 결혼, 출산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그러니까, 당장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도 막막한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는 거다.
아직은 30대임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젊꼰'(젊은 꼰대)으로서 당황했다. '왕자와 공주는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어린 시절 동화책 판타지 탓이었을까. 결혼과 출산은 자연스러운 인생의 경로라고 여겨 왔고, 결혼을 고민 중인 후배들이 있다면 '안 해도 후회, 해도 후회'라면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다독이곤 했다.
하지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 "포기를 강요당한 것"이라는 요즘 청춘들에게 이런 조언은 배부른 소리였을 뿐. 그들에게 연애, 결혼, 출산은 불안을 넘어선 공포였다. 어린 시절부터 영어유치원, 초등 의대반 등 무한 경쟁에 자신을 갈아 넣고, 한 번의 입시로 직장, 결혼의 '레벨'이 결정되며, 부모의 경제적·시간적 도움 없이는 집 장만뿐 아니라 아이 양육마저 꿈도 못 꾸는 현실. 결혼과 출산의 계급 대물림이 더 공고해지는 상황에서 청춘들의 공포가 어리석다고만 할 수 있을까.
"내가 살아온 생이 행복하지 않은데,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은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요?"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를 두고 일각에선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누구보다 책임감 넘치는 판단을 하는 중이다. '아이를 낳지 않을 결심'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인 동시에 불행을 대물림시키지 않으려는 그들만의 합리적인 선택인 셈이다.
인구 감소 기획을 한다고 하자, 주위에선 '그래서 또 애 낳으라는 얘기할 거냐'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그게 정답이 될 수 없고, 돼서도 안 된다는 건 수백조 원을 쏟아붓고도 수직하강 중인 출산율이 말해준다. 그러니 호들갑은 그만 떨었으면 한다. 매 정권 입장에선 당장의 성과가 급할 수 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할 거 같다고 위기론만 부추기며 뜬금없는 '관제 미팅', 실효성 없는 '일회성 금전적 인센티브' 같은 근시안적 정책만 펼친다면, 청춘들은 내내 콧방귀만 뀔 거다.
이참에 젊은 세대에게 공감 대신 반발만 불러오는 허울 좋은 저출산 대책은 없애는 것도 방법일 것 같다. 출산과 여성을 '노동력 생산'의 '도구'로만 인식하는 태도로는, 더 큰 화를 부를 뿐. 대신 젊은 세대가 입시, 취업, 주거, 커리어 등에서 결혼과 출산이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 사회 전반의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하면 어떨까.
원래 공부해라 잔소리 들으면 책상에 앉았다가도 공부하기 싫어지는 법. 아이 낳지 않아도 된다, 너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게 먼저다라고 말해줄 때, 이 땅의 청춘들은 삶의 다음 스텝을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결혼해라, 아이 낳으라'는 말을 줄이는 것부터가 저출산 대책의 시작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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