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불확실한 상황의 판단 오류
직관적 판단보다 숙고 필요
어림짐작 오류에 대비해야
현직 판사 103명과 사법연수원생 76명, 서울대생 134명이 한 실험에 참가했다. 이들에게 청구금액을 5억 원, 2,000만 원(일부 청구), 0원으로 하는 동일한 손해배상 사례가 제시됐다. 각 조건에서 손해배상액을 얼마로 하겠냐는 질문에 대해 판사들은 5,306만 원, 3,200만 원, 3,927만 원, 사법연수원생들은 9,088만 원, 1,836만 원, 3,564만 원, 대학생들은 2억7,472만 원, 2억5,830만 원, 7,303만 원이라고 답했다.
이 실험은 정박효과(anchoring·앵커링)에 관한 것이다. 각 집단의 판결액에 차이가 크지만 세 집단 모두에서 앵커링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정박효과란, 사람들이 처음 제시된 초기 값에 강한 영향을 받는 현상을 말한다. 형사재판에서 앵커링의 대표적인 경우가 검사의 구형이다. 구형은 판사를 기속하지 않지만 실제 양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정박효과는, 인간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합리적 이성이 아니라 직관적 판단인 어림법(휴리스틱)을 사용한다는 '판단과 의사결정 연구'의 주요 내용 중 하나였다.
직관적 판단의 인지적 오류와 편향(bias)에 대한 연구는 무수히 많다. 양육권을 다투는 부부의 사정을 요약한 <표1>을 보자.
A와 B는 양육권을 다투고 있는 부부다. A는 모든 면에서 무난하다. 반면, B는 뚜렷한 약점과 강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 실험에서 '누가 양육자로 적합한가'라는 질문에 관하여 64%가 B를 선택했다. 놀랍게도 '누가 양육자로 부적합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55%가 B라고 대답했다. 질문에 따라 소송의 승패가 달라졌다. 왜 이런 결과가 발생했을까? 사람들은 부적합을 물으면 부적합한 이유를, 적합을 물으면 적합한 이유를 우선 탐색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프레이밍 효과라고 한다.
어떤 요소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기본 비율 즉 기저율을 무시하는 경향도 오판의 주요 원인이다. '피해자다움' 논의가 기저율이나 대표성 휴리스틱과 연관이 깊다. 사람들은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에게 어떤 전형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대표성에 피해자가 부합하는지에 터 잡아 피해자를 '피해자 범주' 혹은 '무고자 범주'에 넣을지를 판단한다. 이 판단이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이유는 피해자 중 피해자다움이 나타나는 기저율을 따져 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기저율에는 성범죄 피해자가 그 피해를 자신의 책임으로 잘못 귀인함으로써 오는 피해자답지 못함과 사법절차 과정에서 겪는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등의 요소도 모두 고려돼야 하지만 실제 판단에는 이런 사정들이 곧잘 무시된다.
가설의 입증과 관련된 연구도 있다. 역추정 오류는 '주어진 증거들을 전제로 피고인이 유무죄일 확률'과 '피고인의 유무죄를 전제로 주어진 증거가 존재할 확률'을 서로 혼동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증거가 전혀 없는 조건에서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유전자정보(DNA)가 피고인의 DNA와 동일할 확률이 99.99%라고 가정하자. 이는 반대로 피고인이 아닌데도 같은 DNA 일치 결과가 나올 확률이 0.01%라는 말이다. 만약 '모집단'이 5,000만 명이라면 그중 약 5,000명(5,000만 명×0.01%)은 피고인과 DNA 일치 판정을 받게 된다. 따라서 피고인이 범인일 확률은 99.99%가 아니라 5,000분의 1 즉 0.0002%다. 99.99%는 피고인이 범인이란 가설을 세운 검사가 바라보는 확률일 뿐이다(검사의 오류).
탈편향의 주요 전략으로 '반대로 생각하기, 외부 관점의 채택' 등이 제시된다. 그러나 휴리스틱은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선택한 것이라 고치기가 대단히 어렵다. 탈편향이 힘든 진짜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한쪽으로 쏠린 존재인지 자체를 인식하지 못함에 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보다 3만5,826배 편향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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