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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환자 커밍아웃' 하자, 일본 돌봄 정책이 바뀌었다

입력
2023.09.21 16:00
수정
2023.09.25 12:33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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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씽, 사라진 당신을 찾아서>
<4> 매일 길을 잃어도 괜찮아
일본 치매당사자·가족협회 가마다 대표
"초기 치매 환자의 90%는 의사 표현 가능"
성급한 사망선고 안돼… 당사자 의견 중요
'치매 서포터' 교육 1000만… "인식 개선돼"

편집자주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치매 실종 경보 문자. 매일 40명의 노인이 길을 헤매고 있다. 치매 실종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무관심하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치매 실종자 가족 11명의 애타는 사연을 심층 취재하고, 치매 환자들의 GPS 데이터를 기반으로 배회 패턴을 분석했다. 치매 선진국의 모범 사례까지 담아 5회에 걸쳐 보도한다.

가마다 마츠요 치매당사자·가족협회 대표가 17일 일본 교토의 협회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른쪽 손목엔 90분짜리 '치매 서포터' 교육을 받으면 지급하는 오렌지색 팔찌를 착용하고 있다. 교토=박지영 기자

가마다 마츠요 치매당사자·가족협회 대표가 17일 일본 교토의 협회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른쪽 손목엔 90분짜리 '치매 서포터' 교육을 받으면 지급하는 오렌지색 팔찌를 착용하고 있다. 교토=박지영 기자

"그저 돌봐준 아내에게 미안할 따름이고, 앞으로 아내에게 잘해주고 싶습니다."

언뜻 보면 평범한 감사 인사 같지만, 이 한마디가 일본 치매 정책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2004년 10월 교토에서 열린 세계알츠하이머회의. 초기 치매 환자인 오치 슌지(57)가 연단에 올라 "치매에 걸려 속상하다"며 짧은 연설을 했다. 일본 치매 환자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언하기는 처음으로, 일본 최초의 '치매 커밍아웃' 순간으로 기록됐다.

회의장에 모였던 2,000여 명의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정책 담당자나 요양보호사 등은 그동안 치매 당사자 의견을 들어볼 생각은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치매에 걸린 부모를 돌보고 있던 간호사 출신 가마다 마츠요 현 치매당사자·가족협회(협회) 대표도 그중 한 명이었다.

'누구를 위한 돌봄인가'... 당사자 목소리 들어야

지난달 18일 일본 교토의 협회 사무실에서 가마다 대표를 만났다. 협회는 1980년 '치매가족협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일본의 대표적인 치매가족 모임으로, 오치의 연설을 계기로 2006년 현재 이름으로 바꿨다. 가마다 대표는 "제품을 만들 때 소비자 의견을 반영하듯, 치매 돌봄 정책을 만들 땐 서비스를 받는 당사자 입장을 포함시키는 게 당연하다"고 밝혔다.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환자 의견을 들어도 상관없느냐'는 지적에 대해선 "치매 초기 환자는 충분히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며 "지금은 환자들이 최대한 스스로 하는 방향으로 돌봄 정책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치매 환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그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게 협회의 생각이다. 예컨대 환자들이 "미리 도와주지 말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고 한다. 가마다 대표는 "환자 대부분은 실수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직접 하고 싶어 한다. 주변에서 도와주게 되면 환자들이 직접 해볼 기회를 빼앗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치매에 걸렸다고 사회인으로서 사망선고를 내려선 안 된다고도 했다. 환자들은 모든 걸 한번에 까먹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가다마 대표는 "초기 치매 환자의 90% 정도는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한다"며 "이 단계에선 의견을 청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배회'라는 용어 사용도 지양하는 분위기다. 배회의 사전적 의미는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걷는다는 뜻인데, 치매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목적지를 잊었을 뿐 원래부터 목적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마다 대표는 "돌아가신 어머니도 몇 차례 배회한 적이 있는데, 친구 선물 사러 백화점에 가려고 하는 등 매번 목적지가 있었다"고 말했다.

치매에 대한 편견 해소돼야 커밍아웃 가능

당사자들 얘기를 듣기 위해선 치매에 대한 편견과 인식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 치매에 걸려도 정당하게 대우받아야 당사자들이 안심하고 치매 진단을 공개하고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치매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교육에서 나온다"며 "일본에선 90분짜리 '치매 서포터' 수업을 들은 사람이 1,000만 명이 넘었는데,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국가적 관심도 커지고 있다. 올해부터 일본에서 치매 당사자의 사회 참여는 법적으로 보장된다. 6월 14일 일본 의회는 '공생사회실현을 추진하기 위한 인지증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 3조 3항엔 "본인과 직접 관계 있는 사항에 대해선 치매 환자의 참여를 가능토록 하고 참여 기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지난해 9월 21일 치매극복의 날을 맞아 구마모토성과 교토타워에 오렌지빛 조명이 켜져 있다. 치매당사자·가족협회 제공

지난해 9월 21일 치매극복의 날을 맞아 구마모토성과 교토타워에 오렌지빛 조명이 켜져 있다. 치매당사자·가족협회 제공

매년 치매 극복의 날(9월 21일)이 되면 지자체들은 교토타워, 구마모토성 등 지역 관광명소를 치매를 상징하는 오렌지색 조명으로 물들인다. 가마다 대표는 "전국적인 오렌지색 라이트 쇼로 치매에 대해 시민들이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희망의 목소리 전하는 치매 당사자들

오치가 커밍아웃한 지 20년 가까이 되면서, 일본에선 돌봄 정책에 대해 의견을 내는 치매 당사자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엔 일본 47개 지자체 중 15곳에서 '희망 대사' 활동이 시작됐다. 초기 치매 환자인 희망 대사들은 치매 당사자로서 강연회나 모임에 나가 치매 증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치매 환자가 희망 대사로 지원하면 지자체에선 면접을 통해 임명하게 된다. 가마다 대표는 "돌봄 정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것만 생각해 본다면 당사자 목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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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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