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집주인은 집을 닮았다. 종일 빛으로, 소리로, 냄새로 존재를 발산하는 목조 주택에 사는 부부의 삶은 그 풍경과 같았다. 목조 건축 회사를 운영하는 남편은 십수 년 노하우를 담아 가족을 위한 목조 주택을 지었고, 아내는 그 집에서 남편, 아이와 부대낀 기록을 남겼다. 서울 은평구 북한산 자락 아래 '9칸집'(대지면적 330㎡, 연면적 277㎡)을 짓고 사는 김갑봉(57) 차민주(47) 부부 얘기다.
아내 차씨는 지난여름, 생애 첫 산문집 '아홉칸 집'에 이렇게 썼다. "집은 인간의 삶 그 자체이기에 삶을 관통하는 기억, 감성, 가치관이 집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유년기를 보낸 소도시의 단층 주택에서 시작해 도심의 자취방을 거쳐 아파트 신혼집까지, 집은 그의 말 그대로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는 여정'이었고, 집을 옮기면서 자신과 가족의 삶도 변했다. "남자아이 둘을 키우며 예외없이 층간 소음 문제가 닥쳤어요. 언젠가 집을 짓고 싶었는데 더 미룰 필요가 없었죠. 마침 은평한옥마을 내 주택지에 유일하게 남은 땅을 운좋게 계약했어요."
설계는 남편의 은사이자, 설계자와 시공자로 만나 수차례 작업해온 도미이 마사노리(75) 한양대 명예교수에게 부탁했다. 100채의 건축을 설계한 일본 건축가는 제자 부부의 의뢰를 흔쾌히 수락했고, 강민정 건축사사무소와 협업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목조주택을 완성했다. 차씨가 쓴 책 '아홉칸 집'을 품고 북한산 자락에 있는 집을 찾았을 때 온갖 풀 나무가 만발한 마당 위로 도토리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개성과 자연성이 어우러진 주택은 2021년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내 몸에 맞는 9칸 집
'9칸 집'은 건물을 지지하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보로 연결한 '기둥보 목구조'다. 기둥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한 칸 단위로 합치고 나눌 수 있는 게 특징인데, 9x9(m) 정사각평 평면을 기본으로, 3x3(m) 정방형 한 칸씩 모여 9칸으로 구성됐다. 왜 하필 '9칸'일까. 도미이 교수는 "9칸은 동양의 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에서 착안한 개념"이라며 "큰 사각형과 가운데 원으로 이뤄진 9칸을 통해 집이라는 소우주를 구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칸을 모듈로 삼아 각 공간이 합쳐지고 나뉘기 때문에 공간 구성이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1층은 거실에 4칸, 사랑방에 1칸, 부엌과 다이닝 공간에 2칸, 계단과 다용도실에 각각 1칸씩을 할애했다. 2층도 1~2칸씩 거실과 방을 구성했다. 차씨는 "구조 변경이 자유롭기 때문에 아이들의 성장에 따라 얼마든지 공간을 바꿀 수 있다"며 "독립된 공간이 필요해 두 칸을 연결한 2층 거실 중 한 칸을 막아 방을 만들어주려고 한다"고 했다.
명확한 공간 구성과 함께 돋보이는 것은 목구조를 그대로 노출한 천장과 나무 마감. '건강하고, 쾌적한 목조주택'이라는 건축주의 철학을 담은 집답게 지하과 지상, 다락 등 모든 공간에서 나무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공간은 계단실. 계단이라고 하면 보통 가로로 판을 연결해 붙인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 집의 계단 나무를 잘라 세로로 이어 붙였다. 수공예품을 만들듯 일정한 간격으로 정교하게 이어 붙인 나무는 저마다 빛깔이 달라 색다른 미감으로 와닿는다. 차씨는 "정말 많은 공력이 들어간 계단"이라며 "남편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며 웃었다.
나무의 아늑한 분위기에 맞춰 한지를 덧댄 창호와 간접 조명을 설치한 것도 두고두고 만족도가 높은 부분. "아파트의 형광등 불빛은 필요 이상으로 밝아서 사람을 날카롭게 만들죠. 종일 은은하고 순하게 일렁이는 빛이 감도는 공간은 사람도 꼭 그렇게 만들어요."
연결되고 흐르는 마당
내부가 나무 자체라면 외부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마당. 집에서 정원이라고 하면 보통 네모반듯한 앞마당이나 중정이 떠오르는데 이 집의 마당은 집을 둘러싼 공간이다. 9칸집의 내부에 순환하는 동선을 만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건축가는 건물 주변에 진입마당, 앞마당, 후정 등 여러 마당을 둬 순환하는 루트를 만들었다. "가정은 가(家)와 정(庭)으로 이뤄지죠. 마당이 없는 집은 원칙적으론 집이 아닙니다. 마당이 있고, 내외부가 긴밀하게 연결될 때 비로소 주거라고 부를 수 있지요."
집을 빙 둘러 짧은 산책을 하면서 다양한 수목과 수변 공간으로 이뤄진 정원을 즐길 수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들어오는 마당은 전면 도로에 면한 앞마당이다. 담이나 울타리 없이 마을 길과 이어지는 개방된 마당이다. 도미이 교수는 "집은 사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네와의 관계를 늘 생각해야 한다"며 "아름다운 포켓 파크(Pocket Park·일반대중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 공원)를 조성하면 집으로 인해 동네의 품격이 높아진다"고 했다.
정원은 내부에서도 이어진다. 1층 거실에서 보이는 수(水) 공간은 또 하나의 정원. 네모반듯한 수생 정원에 사시사철 아름다운 식물을 볼 수 있고, 적당한 거리감을 느끼며 거리 풍경도 조망할 수 있다. "집에 머물다 보면 정말 좋은 순간이 있어요. 주로 마당을 통해 풍경을 바라볼 때죠. 해가 질 때 거실에 있으면 볕이 길게 들어오면 천장에서 빛의 일렁거림이 느껴지는데, 그때를 가장 좋아해요."
목조 주택은 '유기농 밥상'
목조 주택 시공을 업으로 하는 부부에게 집은 막연히 미뤄둔, 그러나 언젠가 꼭 풀어야 할 숙제였을 터. 나무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기본에 집중한 집에서 부부는 목조 주택의 아름다움에 매일 감탄하면 살고 있다고 했다. "목조 주택은 '유기농 밥상'과 같아요. 수면이나 호흡하는 건 물론이고, 음악을 들을 때도 몸에 느껴지는 감각이 완전히 다르죠. 몸과 마음이 참 건강해졌어요." 그의 말대로 밀폐된 고층 빌딩이나 아파트의 콘크리트 벽은 10~15kHz 이상의 소리를 차단시켜 인간의 정서에 필요한 초고음역의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목조 주택은 새소리나 풀벌레 소리 같은 초고음역의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정서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숲에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숙면을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집이 준 또 하나의 선물, 바로 글 쓰는 삶이다. 차씨는 집에 이사 온 후 2층 침실 옆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꼬박 2년 동안 글을 썼다. 한두 편씩 완성한 글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됐다. "모든 공간이 그렇지만 이 작은 공간이 참 각별했어요. 집에 대한 글을 쓰면서 실은 삶을 정리하고 재구성했으니까요." 주인을 닮은 집은, 참 많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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