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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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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보는 세상의 모습, 그게 자신을 해하려는 엄마 혹은 아빠의 눈빛이라면.
20여 년 전 일가족 사망 사건을 쫓았던 경찰 간부가 수사 당시를 떠올리며 이 이야기를 꺼냈다. 한 남성이 추락사해 행적을 쫓다 보니 자택에 아이와 아내가 숨져 있었다는 거다. 자세히 풀어놓을 순 없지만 사건 현장은 더없이 참혹했다고 한다. 아이가 부모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흔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에.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일 일가족 사망 사건은, 생각보다 빈번히 그리고 처절히 발생한다. 최근엔 영암에서, 대전에서, 인천에서 그리고 송파에서 연달아 가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어떻게든 세상을 살아내려던 가족을 궁지로 몰아넣은 사연은 각기 다를 것이다. 다만 비극을 그리는 공통점은 있다. 극단적 선택을 결심한 부모가 자신들의 손으로 먼저 자녀를 세상과 등지게 했다는 절망적인 마침표다. 사건 현장이 참혹하든 고요하든, 아이들은 크디큰 충격 속에서 사그라졌을 것이다. 갖가지 고통에 헤매다 종국엔 내게 손을 뻗는 부모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내면서 말이다.
고작 17개월 전 엄마가 된 나로선 최근의 일들이 가슴에 그대로 내다 꽂힌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절, 감염자인 채로 음압병동에서 어렵게 출산을 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아기 얼굴을 봤다. 부모 품에 한번 안겨 보지도 못한 채 그 시간을 보냈을 아이를 생각하며 애달팠지만, 긴 걱정이 겸연쩍게도 아이는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깽깽 울었다. 젖냄새를 맡자마자 울음을 뚝 그치던 아이의 또랑또랑한 눈을 보고선 어쩐지 안심이 됐다. 내 걱정이 어떤 크기인들, 삶을 향한 아이의 의지는 늘 그 자체로 빛나리란 생각이 들어서다.
'사업에 실패해, 빚에 시달려, 범죄에 연루돼···.' 일련의 일가족 사망 사건에서 확인된 원인은 대체로 '어른들의 서사'로 꽉 차 있다. 그들의 삶을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냐마는, 부모가 없이 홀로 남겨질 자녀의 무게를 어찌 가늠하겠냐마는, 살아서 빛날 아이 미래의 가치 역시 그 누구도 감히 깎아내릴 수 없지 않은가.
'동반 자살'이라는 오래된 정의 안에서 '자녀 살해'의 관점이 강조돼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가족의 공동체적 삶을 중시하는 한국에서 유독 이러한 사건이 빈번한데, 이미 미국과 유럽에선 '자녀 살해 후 극단적 선택'을 극심한 아동학대의 범주로 이해하고 있다. 국내의 많은 사회학자, 심리학자 역시 "자녀 살해는 부모가 겪는 실패의 경험과 감정을 자녀에게까지 일방적으로 덧씌우는 것에 불과하다"며, 이 사안을 무겁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모성과 부성이란 게 얼마나 진한데 오죽했으면···'이란 관습적 이해를 끝으로 사건을 흘려보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이 커다란 비극을 그 가족의 일로만 묻어둘 수는 없는 이유도 있다. 대다수의 사건에서 이들 가족은 밀린 가스요금과 수도요금, 채무와 빚 독촉, 아이의 학교 결석 등으로 사회에 여러 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 가구를 발굴하는 시스템이 좀 더 기민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사건마다 '심리부검'에 준하는 철저한 규명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는 진단은 그래서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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