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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사고 방식'이고 '소통'이다"

입력
2024.01.15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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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ra Elkin(1938.10.16~ 2023.11.8)

샌드라 엘킨은 1970년대 미국 공영방송 PBS의 인기 토크쇼 'Woman'을 기획-제작하고 진행한 방송인이다. 방송 경력도 전무한 소도시의 평범한 전업 주부였던 그는 여성-아내-엄마로서 느꼈던 고립감과 지적-사회적 갈증을 해소해줄 프로그램을 지역 방송사에 건의했고, 결과적으로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의 성취와 지향을 공영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에 알렸다. Getty Images

샌드라 엘킨은 1970년대 미국 공영방송 PBS의 인기 토크쇼 'Woman'을 기획-제작하고 진행한 방송인이다. 방송 경력도 전무한 소도시의 평범한 전업 주부였던 그는 여성-아내-엄마로서 느꼈던 고립감과 지적-사회적 갈증을 해소해줄 프로그램을 지역 방송사에 건의했고, 결과적으로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의 성취와 지향을 공영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에 알렸다. Getty Images

미국 버팔로(Buffalo) 시는 맘만 먹으면 산보 삼아 캐나다 국경도 넘나들 수 있는 뉴욕주 북단 도시다. 오대호 중 하나인 이리호에서 대서양으로 흐르는 나이아가라 강의 내륙 항구를 끼고 있어 한창때는 철강과 해운 중심지로 흥성했지만 20세기 중반 탈산업화가 본격화하면서 이제는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 경유지로 드문드문 언급되는, 주민 수 27만 명 남짓의 작고 오래된 도시. 캐나다 토론토가 워싱턴D.C나 뉴욕보다 가깝고 또 왕래도 잦아 지역방송도 뉴욕주 서북부와 캐나다 온타리오주 남부를 단일 시청권으로 삼고 있다. 그 방송사가 미국 공영 PBS의 300여 개 지역 협력 방송사 중 한 곳인 ‘WNED’다.
1970년대 미국 전역을 뒤흔든 WNED의 토크쇼 ‘Woman’이 1972년 11월 2일 일요일 저녁 첫 회를 송출했다. “여성의 세계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합니다.(…) 우리 시리즈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살펴보고자 하며(…) 매주 주제별 전문가 등을 게스트로 초청할 것입니다. 첫 10주간은 아내로서의 여성을 다룰 예정이고, 오늘 첫 주제는 불감증(Frigidity)입니다.

정신건강의학자와 산부인과 의사 등 출연자들은 불감증이란 용어에 담긴 여성비하적 의미를 환기하며 그 자체가 사회적 성차별의 소산이라고 주장했다. 불감증이나 성기능 장애라는 낙인을 찍기 전에 부부 관계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것. 처녀성이란 말(의 의미)에 상응하는 남성의 용어가 없는 것처럼, 왜 부부 성생활의 책임이 늘 여성의 불감증으로 수렴되는지 먼저 반문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71년 영화 ‘클루트(Klute)’에서 고급 콜걸 역을 맡아 골든글러브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탄 배우 제인 폰다가 성행위 도중 흥분한 척 연기하며 손목시계를 흘끔 쳐다보는 장면으로 남성들의 마초적 우월감에 상처를 준 직후였다.

출연자들은 성과 여성의 심리, 오르가즘, 자위, 출산-노화와 성, 여성 성기의 해부학적 기능에 대해 거리낌없이 대화했다. 시청자들은 ‘정보’의 가치에 앞서 사적인 자리에서도 화제 삼기 꺼리던 은밀한 주제들이 공영방송을 통해 전혀 선정적이지 않게 토론되는 ‘현상’ 자체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건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를 읽거나 페미니즘 행사장에서 리더의 연설을 듣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다. 공론의 힘이자 언론의 힘이었고, 진영을 넘어선 공동체적 협의와 성찰의 과정이었다. 아마도 시청자 일부는 자신을 짓눌러 온 자책감에서 얼마간 벗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특별한 홍보 없이 그렇게 시작된 토크쇼 ‘Woman’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6개월 만에 뉴욕 동부교육네트워크로 (재)방영되기 시작했고, 74년부터는 PBS의 185개 지역 방송사를 통해 알래스카에서 텍사스 소도시까지 거의 미국 전역으로 송출됐다. 출연 섭외 전화를 걸면 “버팔로요? 거기가 어디죠?”라고 묻곤 하던 게스트들은 점차 “아, 예! 버팔로요!”하며 반색하게 됐고, 그렇게 베티 프리댄과 글로리아 스타이넘, 도로시 피트먼 휴즈, 마르시아 앤 길래스피 등 여성운동의 기라성 같은 전사들이 줄지어 출연했다. 30개 테마를 선정해 방송을 시작한 제작진은 끊임없이 이어진 시청자들의 제안 덕에 주제를 고르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여성 토크쇼 'Woman'은 72~77년의 약 5년 간 매주 한 편씩 197회 이어졌다. 미국 남부 한 여성의 각성의 과정을 기록한 베스트셀러 논픽션 'Mama Doesn't Live Here Anymore'의 작가 주디 설리번은 그 프로그램을 "한마디로 기적이었다"고 평가했다. americanarchive.org

여성 토크쇼 'Woman'은 72~77년의 약 5년 간 매주 한 편씩 197회 이어졌다. 미국 남부 한 여성의 각성의 과정을 기록한 베스트셀러 논픽션 'Mama Doesn't Live Here Anymore'의 작가 주디 설리번은 그 프로그램을 "한마디로 기적이었다"고 평가했다. americanarchive.org


그 거대한 열풍이 당시 버팔로의 30대 중반 무명 전업 주부 샌드라 엘킨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그는 여성으로서, 또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알고 싶은 정보들, 북동부 변방까지 충실히 전해지지 않던 60,70년대 사회적 변화와 논의의 흐름을 전해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고 건의했다. 작은 지역방송이어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방송사 측은 경력도 전무한 엘킨에게 토크쇼 기획뿐 아니라 주제 선정과 토론자 섭외까지 프로그램 전반의 총괄 지휘를 맡겼다. 엘킨은 시즌 1 진행자였던 배우 겸 방송인(Samantha Dean)이 중도 하차한 이듬해 시즌 2부터 진행까지 맡았다. 여성에 의한 여성 토크쇼 ‘Woman’은 77년 5월 197회로 종영될 때까지 여성 질병과 주부 알코올 중독, 피임과 출산, 자녀 성교육, 결혼제도, 가정폭력, 정치 등 다양한 주제를 섭렵하며, 가히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의 성취와 지향을 미국-캐나다를 비롯 영국 등 유럽 일부 국가에까지 실어날랐다.
그 방송으로 누구보다 많이 달라진 건 엘킨 자신이었다. 페미니즘이란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특정한 이념-원칙이 아니라 사고 방식이고 더 많은 소통"이라 여겼던 무명 페미니스트 방송인 샌드라 엘킨이 심장 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샌드라 앤 매러티(Sandra A. Marotti, 1938.10.16~ 2023.11.8)는 버몬트주 러트랜드(Rutland)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단사였고 어머니는 투자회사 비서였다. 고교시절 연극 연출을 시작해 주 경연대회에서 수상하며 뉴잉글랜드 드라마 페스티벌에도 참가했고, 버몬트주 폴트니(Poultney)의 그린마운틴칼리지에 진학해서도 연극을 전공했다. 그린마운틴 여름 연극제에서 대회 총괄 감독이던 컬럼비아대 출신 배우 겸 연출가 사울 엘킨(Saul Elkin)을 만나 58년 결혼했고, 69년 사울이 버팔로주립대에 자리를 잡으면서 버팔로로 이사했다. 결혼 직후 부부는 연년생 아들 둘을 낳았다. 전후 베이비 붐 세대 이전, 즉 전통과 관습에 순응하던 ‘고요한 세대(Silent Generation)’의 일원이던 엘킨은 대학시절 동부 여성운동의 곁불을 쬐긴 했지만 의식고양모임이나 여성 행사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출산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스스로 포기한 채 전업주부로 사는 동안 그는 막연한 박탈감을 느꼈고, 아이들이 10대가 되면서 고립감과 사회적 갈증도 커져갔다. 그는 지역 방송사가 뭔가를 해주길 바랐다.

그는 개인적인 궁금증에서 모든 게 시작됐다고 말했다. “나와 친구들을 괴롭히는 질문들에 대해 메모를 하기 시작했고 그 질문들을 카테고리로 분류해 방송사에 제안했어요. 그게 내가 처음 제시한 약 30개 분량의 주제 목록이었죠.

그는 토크쇼의 취지가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을 내리거나 세상을 바꾸려던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자신처럼 평범한 여성-시민들의 솔직한 대화로 ‘현실’을 보여주고 전문가를 통해 정보와 의견을 전달하자는 것, 즉 서로 교류하며 ‘소통’하자는 것이 취지이자 목적이었다. 토크쇼에는 저명한 전문가나 활동가뿐 아니라 주부나 10대 여고생, 여성 연금생활자, 여성교도소 재소자, 남성 조산사 등이 게스트로 출연할 때가 훨씬 잦았다.

버지니아주 지역 신문 로어노크 타임스(Roanoke Times) 1974년 4월 26일자에 실린 샌드라 엘킨 기사. 엘킨은 주로 청바지에 캐주얼 정장 차림으로 토크쇼를 진행했고, 출연자에게도 거실에서 담소하듯 편안하게 말해 달라고 청하곤 했다. newspapers.com

버지니아주 지역 신문 로어노크 타임스(Roanoke Times) 1974년 4월 26일자에 실린 샌드라 엘킨 기사. 엘킨은 주로 청바지에 캐주얼 정장 차림으로 토크쇼를 진행했고, 출연자에게도 거실에서 담소하듯 편안하게 말해 달라고 청하곤 했다. newspapers.com

엘킨은 늘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방송을 진행했다. 그 옷차림처럼 그가 게스트에게 요구한 것도, 방송 형식과 내용에서 한사코 고수한 것도 '최대한 캐주얼하게'였다. “각본으로 연출되지 않은, 솔직하고 우연한 말들.” 그는 “옛날 TV 생방송처럼 게스트가 정말 터무니없는 말을 하더라도 그대로 내보낸다는 원칙”을 준수했다. 그러다 보니 방송시간 30분은 늘 부족했고, 중요한 걸 놓치거나 포기해야 할 때도 많았다. 엘킨은 “시간 제약 때문에 답답할 때가 많았지만 방송에서 갈증을 느낀 시청자들이 각자 지인들과 토론을 이어갈 수 있게 이슈를 던져주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고 말했다. 다루고 싶은 내용은 넘쳐났다. 그는 “인류 절반(여성)이 안고 있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소개하고 나머지 절반까지 암시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주제는 거의 무한했다”고 말했다. 방송 직후부터 “당신은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지만…”으로 시작되는 시청자 전화가 쇄도했다. "방송 덕에 벽장에서 나와 페미니스트라 자처할 수 있게 됐다"고 고마움을 전한 이도 있었다. 초기 그의 소망이었던 충분한 제작비와 방송 네트워크, 즉 프로그램을 양껏 만들어 더 많은 여성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바람은 이듬해 PBS를 통해 넉넉하게 실현됐고, 영국과 스위스에도 방영권이 팔렸다.

물론 70년대여서 가능한 방송이기도 했을 것이다. ‘70년대 팝의 여왕’이라 불린 헬렌 레디(Helen Reddy, 1941~2020)가 자신의 빌보드 차트 1위 곡 ‘I Am Woman’을 발표한 게 72년이었다. “나는 여자야, 내 포효를 들어봐(…) 나는 강하고, 나는 무적이고, 나는 여자야(...)”
‘성평등 헌법 수정안(ERA)’도 순항 중이었다. 1923년 처음 상정-무산됐다가 70년 부활한 수정안은 72년 3월 각 주 비준 절차가 시작된 지 석 달 만에 정족수(3/4, 38개 주)의 절반을 넘겨 20개 주 의회 비준을 받았다. 의회 92차 회기 (71.1~73.1)는 당시 기준 역대 회기 동안 통과된 성평등권 법안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법안을 가결했다. 평등고용기회법, 여성 교육-스포츠 차별을 근절한 개정 교육법(Title IX)이 제정된 것도 72년 그 회기였다. 73년 1월엔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임신중단권을 합헌 판결했고, 페미니즘 잡지 ‘Ms’가 창간된 72년 그해에 연방공문서인쇄국이 ‘Ms’를 여성의 경칭으로 공식 채택했다. 대학들은 경쟁적으로 여성학 강좌를 개설했다. ERA를 부활시킨 주역인 미시건주 민주당 여성 하원의원 마사 그리피스(Matha Griffiths)가 제도적 성 평등을 위한 투쟁은 사실상 승리로 끝났고 “이제 무대를 정리할 일만 남았다(mopping up stage)”고 선언했다.

70년대엔 공화당도 지금 같지 않았다. 강성 우파 정치인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의 64년 대선 참패에 충격을 받은 공화당은 당내 극우파와 거리를 두며 젠더 이슈에도 유연했다. ‘Title IX’에 서명한 공화당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여성 고용의 마그나 카르타’라 불리는 행정명령 4호’로 연방정부와 거래하는 기업에게 여성 채용 확대 방안 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했다. 닉슨은 영유아 보육에 대한 연방 예산 지원을 ‘아동 교육의 소비에트화’라며 거부하기도 했지만, 72년 8월 뉴스위크는 “워싱턴D.C에서 여성운동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은 리처드 닉슨일지 모른다”고, 아이러니의 뉘앙스를 섞어 보도하기도 했다. 닉슨 후임 제럴드 포드(공화) 역시 행정부 여성 비율을 획기적으로 늘렸고, 행정명령으로 유엔의 1975년 세계여성의 해 선포 기념 전국위원회(NCOIWY)를 출범시켰다.

1977년 텍사스 휴스턴에서 열린 전국여성대회 참가자들. 여성학자들은 77년 저 행사를 2세대 페미니즘 운동과 백래시의 분수령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앞줄 왼쪽 두 번째 코트 차림의 여성이 베티 프리댄이다. AP 연합뉴스

1977년 텍사스 휴스턴에서 열린 전국여성대회 참가자들. 여성학자들은 77년 저 행사를 2세대 페미니즘 운동과 백래시의 분수령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앞줄 왼쪽 두 번째 코트 차림의 여성이 베티 프리댄이다. AP 연합뉴스


수전 팔루디는 91년 저서 ‘백래시(Backlash)’에서 백래시를 "가부장제 하의 전통적 여성 억압-차별과 구분해 젠더 평등의 성취에 경계심과 두려움, 적개심을 갖게 된 남성 권력의 반격"으로 정의했다. 그가 책에서 주목한 건 주로 80년대 레이건 시대의 백래시였다. ”가장 최근의 반격은 1970년대 말,(…) 복음주의 우파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표면화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백래시는 페미니즘의 제도-문화적 성취가 가시화하던 7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반페미니즘의 열정적 선동가 필리스 슐래플리(Phyllis Schlafly)가 보수단체 ‘이글 포럼’을 창립해 ‘Stop ERA’운동을 시작한 게 1972년 2월이었고, 존 버치 소사이어티, 복음주의 기독교 등 보수 기독교단이 반페미니즘 연합전선을 형성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들은 페미니즘을 군대에 안 가도 되는 여성의 권리를 빼앗고, 이혼을 당해도 위자료조차 못 받게 하려는 ‘여성의 적’들의 선동이자 가정(가족)의 가치를 부정하는 비(非)미국적인 사상이라고 선전했다. 반페미니즘 활동가들은 페미니스트 대회에서 촬영해온 자위기구 영상을 교회 네트워크 등을 통해 방영하며, 오늘날 동성애자에게 하듯이, 페미니스트를 악마화했다. 슐래플리도 엘킨의 토크쇼(73년 12월)에 출연했다. 엘킨은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안에 대해 유일한 관점만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77년 11월 포드 정부의 500만 달러 예산을 지원받아 텍사스 휴스턴에서 열린 전국여성대회는 여성단체 주역들과 로절린 카터 등 3명의 퍼스트레이디를 비롯 2만여 명이 모여 성대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그 행사장에서 불과 8km 떨어진 곳에서 열린 슐래플리의 반대 집회에도 무려 1만 5,000여 명이 운집해 ERA 반대와 낙태 반대, 동성애 반대를 외쳤다. 슐래플리는 자신들의 대회는 정부 지원-동원 없이 개인과 단체의 후원금으로 자발적으로 치러졌다고 자랑했다.
백래시는 베트남전쟁 패배와 제조업 중심 산업-노동구조 재편, 그로 인한 백인 남성 노동계급의 추락과 위기감이라는 순풍을 타고 점점 거세게 번졌다.
대회 직후부터 공화당은 발빠르게 몸을 사리기 시작했고, ERA수정안도 비준을 목전에 둔 시점에 5개 주가 비준 결정을 철회하면서 무산됐다. 엘킨의 토크쇼 ‘Woman’도 77년 5월 ‘여성과 성공(Women and Succcess)’을 끝으로 종영됐다. 2012년 미국공영방송공사는 'Woman' 전 회 방영분을 주요 프로그램 디지털 아카이빙(AAPB) 첫 작품 중 하나로 선정했다.

비가시성(Invisibility)은 반드시 차별을 수반한다고 믿던 샌드라 엘킨은 2000년대 약 10년 간 세계 35개 국을 돌며 소외된 여성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사진은 그가 촬영한 2002년 베트남 하노이의 여성 노인들. http://womenoftheglobe.com/

비가시성(Invisibility)은 반드시 차별을 수반한다고 믿던 샌드라 엘킨은 2000년대 약 10년 간 세계 35개 국을 돌며 소외된 여성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사진은 그가 촬영한 2002년 베트남 하노이의 여성 노인들. http://womenoftheglobe.com/

엘킨은 80년대 초 사울과 이혼한 뒤 아동 청소년 성 정신건강 의학자 안케 이어하트(Anke A. Ehrhardt)와 2013년 재혼해 해로했다. 디지털 저작권 에이전트로, 칼럼니스트로,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AIDS 예방 교육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2010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페미니즘과 민주주의, 사진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기둥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등 세계 35개 국을 돌며 소외되고 잊힌 여성들, 특히 나이든 여성들을 만나 대화하며 촬영한 초상화 프로젝트 ‘지구촌 여성들’을 진행해 2013년 전시회를 열었고, 2008년 대선을 앞두고는 자신의 고향 버몬트주의 작은 마을 여성 서기 19명을 인터뷰해 그들 ‘민주주의의 파수꾼’들이 행정 최전선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기록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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