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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속삭이는 모래... 백리·천리·만리, 마침내 구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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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충남 태안의 해안선 길이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거리와 비슷한 길이의 해안선을 따라 27개의 해변이 이어진다. 예로부터 큰 자연재해가 없고 온화한 기후와 풍성한 먹거리로 삶이 고단하지 않아 태안(泰安)이라 했다. 1978년 일대가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펼쳐진 갯벌과 사구, 기암괴석과 크고 작은 섬들이 서해 특유의 아름다운 경관을 빚는다. 주로 안면도에 관광 명소가 몰려 있지만, 군 북쪽 해안도 뒤지지 않는다. 소원면 파도리에서 원북면 신두리까지 ‘태안해변길’을 소개한다. 해안 절경과 드넓은 모래사장이 파도 소리 따라 펼쳐지는 길이다.
파도리, 이렇게 몰캉하고 설레는 지명이 또 있을까? 태안 소원면 남쪽, 길쭉하게 남북으로 뻗은 작은 반도 서편에 파도리 해변이 있다. 자그마한 해변에 잔잔하게 바닷물이 밀려들고 갯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간지러운 곳이다. 고려 문종 때 '파도가 거칠어 지나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일컬은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 해변은 두 갈래 해식동굴에서 찍은 사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퍼지면서 제법 유명해졌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여행객은 대부분 작은 해변을 뒤로하고 우측 험한 갯바위로 방향을 잡는다. 파도와 침식으로 거칠게 펼쳐진 바위(파식대지)에 굴 껍데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산자락에서 가파르게 떨어진 해안 절벽(해식애)이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그 절벽에 여러 개의 자연 동굴(해식동굴)이 형성돼 있는데, 사진 포인트는 가운데 기둥을 사이에 두고 두 방향으로 뚫린 굴이다. 안에서 바깥으로 찍은 사진이 낯섦, 호기심, 신비로움 등 여행의 기대를 부풀린다. 바로 옆 동굴 아치는 코끼리를 닮았다.
물이 드는 만조 때는 해식동굴까지 갈 수 없다. 다급할 경우 반대편 산길을 이용해 어은돌 해변으로 대피하라고 적혀 있다. 일대에서 가장 큰 모항항과 파도리 사이에 위치한 어은돌 해변은 '고기가 숨을 돌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만큼 주변에 갯바위가 많다는 뜻이다.
파도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보령 대천, 부안 변산과 함께 서해안 3대 해변으로 꼽히는 만리포 해변이다. 여행자를 겨냥한 숙소와 음식점도 이곳에 집중돼 있다. 동해안 해변의 자랑이 하얀 모래와 짙고 푸른 바닷물이라면 서해의 해변은 간조 때 끝없이 펼쳐지는 단단하고 고운 모래다. 만리포 역시 만조 때 해안까지 밀려들어 오는 바닷물이 간조 때는 해안선 길이만큼 뒤로 물러난다. 사람이 모래알처럼 작게 보일 때까지 바다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만리포는 조선 초기 중국 사신을 전송하며 '수중만리 무사항해'를 기원하면서 만리장벌로 불리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장년층에는 1958년에 발표한 대중가요 ‘만리포 사랑’으로 친숙한 해변이다. 똑딱선 드나들던 항구는 이제 해변 남쪽 끝 조그마한 포구로 흔적만 남아 있다. 해변 입구에 세워진 노래비와 상징 조형물 뒤로 펼쳐지는 낙조가 젊은 날의 아련한 희망을 노래한다.
만리포 바로 위는 천리포 해변이다. 만리포보다 규모가 작아 이름 붙여진 해변이다. 마을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해변에 모래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바람에 쓸려가지 않도록 모래 포집 그물이 설치돼 있다. 만리포의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한적하게 거닐 수 있는 어촌마을이다.
만리포와 천리포 사이에 국내 최초의 민간 수목원인 천리포수목원이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출생해 한국인으로 귀화한 민병갈(1921~2002) 박사가 1962년부터 부지를 구입해 가꾼 수목원이다.
바다와 접한 62㏊(헥타르) 부지를 밀러가든과 에코힐링센터, 목련원, 낭새섬, 침엽수원, 종합원, 큰골 등 7개의 지역으로 나눠 식생에 맞춰 다양한 식물을 심었다. 상시 개방하는 밀러가든과 에코힐링센터에만 목련, 동백, 호랑가시나무, 무궁화, 단풍나무 등 1만6,800여 종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천리포수목원의 가장 큰 특징은 꾸민 듯 아닌 듯한 자연스러움에 있다. 사진 찍기 좋도록 대규모 꽃 군락을 조성한 다른 수목원처럼 단박에 이목을 끌지는 못한다. 대신 자연의 시간에 맞춰 성장하는 수목원의 은은한 매력이 가득하다.
요즘은 바닥에 노란 크로커스와 하얀 설강화가 보석을 뿌려 놓은 것처럼 눈부시다. 가지가 세 가닥으로 벌어진 삼지닥나무, 꽃송이를 보고 한 해 풍년 농사를 점쳤다는 풍년화도 숲속에서 노란 꽃송이를 매달고 있다. 수목원 서편 해안에 설치한 덱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천리포에서 이어지는 모래사장이 발아래 펼쳐지고, 그 너머로 낭새섬이 보인다. 지역에서 닭섬이라 부르는 자그마한 섬이다.
천리포에서 약 1.5㎞ 떨어진 백리포 해변은 이름처럼 작고 아담하다. 해변으로 가는 산등성이에서 보면 옴폭 들어간 지형에 은밀한 요새처럼 산과 바다 사이에 숨어 있다. 좁은 비포장 산길로 연결돼 있어서 만리포나 천리포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지고 편의시설이 없어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해변이다. 그만큼 호젓하게 바다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백리포의 본래 명칭은 방주골이다.
백리포에서 4㎞ 위쪽에 있는 구름포도 분위기가 비슷하다. 해안으로 연결된 비포장 도로를 따라가다 낮은 언덕을 넘으면 캠핑장이 나타나고, 덱 산책로가 깔린 솔숲을 통과하면 산자락에 둘러싸인 동그랗고 아담한 해변이 비밀의 장소처럼 나타난다.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단단한 모래사장에 포물선을 그리며 얇게 번진다.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나만의 봄 바다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구름포 입구 의항해변에는 전통 어로 방식인 독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구름포 해변 안내판에는 자연복원될 때까지 출입을 제한하는 구역이 표시돼 있다. 인근 바다는 2007년 12월 허베이스피리트호가 최악의 원유 유출 사고를 일으킨 곳이다. 일대 바다와 해안은 검은 기름으로 덮였고 도저히 복구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전국에서 모인 130만 명의 자원봉사자와 지역 주민의 땀과 노력으로 단기간에 회복하는 기적을 일궜다.
구름포에서 태배전망대에 이르는 약 2㎞ 등산로는 바로 ‘태안의 기적’을 돌아보는 길이다. 솔숲 아래 파도가 들이치는 바위는 옛 모습을 되찾았고, 바다도 다시 쪽빛으로 넘실거린다. 전망대 아래 안태배 해변에는 굴 양식 시설을 배경으로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주민들의 손길이 바쁘다. 이 바다가 다시 살아났음을 증언하는 풍경이다.
소원면과 원북면 사이 바다를 메운 방근제 뚝방을 지나면 태안해변길은 소근진성으로 이어진다. 조선 중종 9년(1514)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읍성이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동·남·북 산등성이를 연결한 650m 성벽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성벽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산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파고든 드넓은 바다와 갯벌이 한눈에 조망된다.
지난 15일 신두리 해변에서는 이색적인 행사가 열렸다. 드넓은 모래사장을 활용한 맨발 걷기(어싱·earthing)와 노르딕워킹이다. 때마침 간조시간, 바닷물이 빠지자 곱고 단단한 모래사장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렸다. 만리포에 비해 아늑함은 덜하지만 규모는 훨씬 크다. 해안에서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곳까지 걸어서 10분 이상 걸렸으니 ‘광활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다.
이날 행사는 장미란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참석한 ‘여행가는 달’ 프로그램의 하나로 진행됐다. 단발성 이벤트여서 아쉬운데, 신발을 넣을 수 있는 배낭과 걷고 난 후 발을 닦을 수건 정도만 챙기면 개인적으로 가능한 체험이기도 하다.
해변 북측은 국내 최대의 모래언덕 신두리해안사구와 연결된다. 1시간가량 걸리는 탐방로를 걸으면 길이 3.5㎞, 최고 높이 19m에 이르는 모래언덕의 이색적인 정취를 즐길 수 있다. 해설사와 동행하면 해당화, 순비기, 개미귀신, 큰집게벌레 등 척박한 모래땅에서 살아가는 동식물까지 신두리사구의 생태를 들을 수 있다.
사구의 중요성이 알려지기 전까지 주민들에게 모래는 지긋지긋한 골칫거리였다. “말해 뭐 햐?”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며 옛 시절을 회고하던 한 주민은 이제 사구 입구에서 모래 훼손을 막는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모래가 자산인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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