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정책 실패, 공직 내 이견 사라진 탓
차관 정치·과도한 감사로 복지부동 심각
부활 민정수석실에서 레드팀 운영 어떨까
가톨릭 교황청에는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폐지하기 전까지 1,000년 가까이 ‘악마의 변호인’이 활약했다. 그들의 임무는 성인(聖人) 추대 후보자에 대한 반대 증거를 찾아 후보자에게 불리한 근거를 서면으로 상세히 작성하는 것이다. 검증은 치밀해, 수십 년간 계속되기도 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추대되는 성인 숫자가 급격히 줄었다. 각 지역 교구에서 추천한 후보가 성인으로 많이 추대될수록 단기적으로는 교세 확대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인도 화폐처럼 흔해지면 가치 하락을 피할 수 없다. 악마의 변호인은 장기적으로 가톨릭 교회와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한참 전 읽은 책 구절이 떠오른 것은 지난주 대통령실이 “전문가와 관료의 관점이 아닌 국민과 민생의 관점에서 정책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부처별 레드팀의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는 소식을 접할 때였다. 악마의 변호인이 바로 오늘날 정부 기업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레드팀의 기원이다. 현대의 레드팀은 상황 시뮬레이션, 프로젝트나 인사 후보의 취약점 조사, 대안을 선택했을 때의 장단점을 따져보는 대체분석 등을 통해 조직의 이익과 목적, 능력 한계 또는 잠재적 경쟁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맡는다.
대통령실이 레드팀 기능 강화를 언급한 것은 정부의 잇따른 정책 헛발질 때문이다. 국가통합인증마크(KC) 없는 해외 제품 직접구매 금지나 고령자 운전자 자격제한 정책 등 최근 사례는 일부분이다. ‘초등학교 입학 연령 5세 하향’이 집권 2개월 만에 불쑥 추진됐다 보수·진보가 한목소리로 반대해 사라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주 69시간 근로 시간 개편안도 같은 길을 걸었다. 사교육, 통신시장, 건설, 과학기술 등 ‘카르텔 근절’ 시리즈도 성과보다 부작용이 더 컸다. 특히 과학기술 카르텔을 근절하겠다며, R&D 예산을 대폭 삭감한 결정은 결국 “R&D 예산 예비타당성 조사 폐지”로 ‘화끈하게’ 후퇴하면서, 오히려 카르텔을 더 조장할 것이란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런 실패가 집권 2년이 넘도록 계속 반복되고 있다. 대통령실이 레드팀 강화 카드를 꺼낸 것은 이를 막을 적절한 처방이다. 하지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성인 후보로 추천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추앙하는 인물에 맞서 악마의 변호사가 업적의 진위와 부정적 측면을 꼬치꼬치 캐내려면 임무에 대해 열정과 확신을 갖춰야 하며, 비난도 견뎌낼 배포 또한 있어야 한다. 이는 교황의 변함없는 지지 없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한국 공직사회는 레드팀이 소신껏 활동할 기반부터 흔들리는 상황이다. 지난해 6월 대통령실 비서관을 대거 정부 부처 차관으로 내려보낸 후, 공직 내부에서 ‘차관 정치’란 말이 생겨났다. 장관이 아니라, 대통령실과 가까운 차관이 부처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또 이전 정권 추진 정책을 책임졌던 공직자는 먼지털기식 감사와 검찰 기소로 곤욕을 치른다. 그 결과가 고위직의 정치화와 실무진의 복지부동 심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부처 공무원이 대통령실 추진 정책에 꼬치꼬치 토를 다는 레드팀 역할을 맡으려 할까.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후 민정수석실을 부활했다. “민심을 가감 없이 듣겠다”는 것이다. 비판적 민심을 경청하는 것도 정책 실패를 줄이는 방법이지만, 더 적극적으로 민정수석실에 상시 레드팀을 설치해 운영하면 어떨까. 과거 민정수석실은 정보를 독점해 대통령의 눈·귀를 가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런데 부활한 민정수석실이 대통령 추진 정책의 문제점을 꼼꼼히 지적하고, 쓴소리를 생산하는 레드팀을 운영한다면, 낮은 지지율을 회복할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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