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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여, 지구별에 바람처럼 왔다 가길"...존 아캄프라가 '영상으로 쓴 시'

입력
2024.10.14 15:08
수정
2024.10.14 15:33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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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런던 2024' 출격한 존 아캄프라
가나 난민 출신에서 기사 작위 받기까지
탈식민주의·디아스포라 30년 영상 작업
'바람이 되어'에서 기후위기 문제 다뤄
영상시(詩)의 캔버스로 LG OLED TV
"평생 꿈꿨던 색과 빛...기술 경이로워"

영국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런던'에서 5개의 스크린을 통해 전시된 존 아캄프라의 '바람이 되어(becoming wind)' 전시 전경. 작가는 97인치 LG 올레드 에보를 캔버스로 사용했다. LG전자 제공

영국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런던'에서 5개의 스크린을 통해 전시된 존 아캄프라의 '바람이 되어(becoming wind)' 전시 전경. 작가는 97인치 LG 올레드 에보를 캔버스로 사용했다. LG전자 제공

윤슬이 반짝이는 남아프리카의 바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파도가 아득히 일렁이는 해변에서 뛰논다. 백사장에서 조개를 줍고, 나무에 올라 먼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이 5개의 스크린에 유유히 지나간다. 태초의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목가적 풍경은 이내 흑백 영상으로 전환된다. 어두운 집에서 글을 읽고, 고립된 방에서 글을 쓰거나, 엄숙하게 어딘가를 응시하는 표정 없는 얼굴은 다시 산불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13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국제아트페어 '프리즈런던'에서 영국의 영화감독 존 아캄프라(66)가 선보인 영상작품 '바람이 되어(Becoming Wind)'의 한 장면이다. 프리즈런던은 2022년 한국에서 시작한 '프리즈서울'의 본진으로 스위스의 '아트바젤', 프랑스의 '피악'과 함께 세계 3대 아트페어로 꼽힌다. 올해는 이달 9일부터 닷새 동안 43개국 160여 개 갤러리가 참여해 수천 점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LG 올레드(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라운지'에 설치된 '바람이 되어'는 유일한 영상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160㎡ 규모 부스의 벽면을 채운 스크린 5개에 담긴 27분 분량 영상에 관람객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관람객 그래그 힐리는 "그림의 콜라주 방식처럼 장면을 이어붙인 구성 방식이 인상적이었다"며 "시적인 영상이 충격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했다.

난민 출신 감독의 메시지 "바람과 같은 존재 돼야"

아프리카 가나 출신의 영국인인 존 아캄프라 감독.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아프리카 가나 출신의 영국인인 존 아캄프라 감독.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영상으로 쓴 시"라는 찬사는 세계적인 영상 아트 대가 아캄프라 감독이라서 가능했다. 아프리카 가나의 난민 출신으로 영국에 정착한 그는 실험적 창작 집단인 블랙 오디오 필름 컬렉티브(BLFC)를 설립해 인종, 탈식민주의, 디아스포라(이산)를 주제로 작품을 선보였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면서도 시적인 영상 언어를 구사하는 감독으로 명성을 얻었고, 1987년 영국 그리어슨 다큐멘터리상을 탄 데 이어 이탈리아, 타이베이, 호주, 루마니아, 캐나다 등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지난해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아캄프라의 특기인 '브리콜라주(bricolage·다양한 장면과 기법을 조합해 영상을 만드는 기법)' 방식은 이번 작품에서도 발휘됐다. 이번 주제는 '기후 위기'. "인류가 바람처럼 무해하게 지구에 왔다 갔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바람을 영상으로 구현했다. 구체적 장면을 보여주기보다 등장인물의 단상과 상징적인 이미지가 바람에 일렁거리듯 5개 스크린에 지나간다.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은 컬러로, 비관적인 현실은 흑백으로 표현했다. 자연물, 사람들의 무표정, 시계 초침 같은 단편적인 장면과 '그것은 우리 사이에서 움직인다',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우리는 태만하다' 등의 문구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빨리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아캄프라는 "빠르고 투명한 바람의 '윤리'에 착안해 인류가 자연과 관계를 맺는 하나의 방식을 상상했다"며 "인류는 가능한 한 적은 탄소발자국을 남기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올레드 기술로 완벽한 영상 구현... "경이롭다"

'프리즈런던'에서 관람객들이 존 아캄프라의 '바람이 되어(becoming wind)' 전시를 보고 있다. LG전자 제공

'프리즈런던'에서 관람객들이 존 아캄프라의 '바람이 되어(becoming wind)' 전시를 보고 있다. LG전자 제공

30분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동시에 상영되는 5개 영상은 모자이크 사진처럼 개별 장면이 섬세하게 엮여 흘러가다가 바다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첫 장면으로 돌아가서 끝난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5개의 영상 작품이 마지막까지 상당한 몰입도와 완성도를 유지한 데는 LG 올레드 스크린이 큰 역할을 했다고 아캄프라는 감독은 말했다. 아캄프라는 1980년대부터 디지털카메라로 작업을 해왔지만 디스플레이 기술의 한계로 원하는 수준의 고해상도 작품을 선보일 수 없었다고 한다. 2년 전 LG 측에 협업을 제안한 감독은 지난 4월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전시에 이어 이번에 두 번째로 작품 디스플레이에 97인치 올레드 에보(eve)를 썼다. 그는 "경이롭다"고 표현했다.

올레드 TV는 백라이트 없이 픽셀 하나가 스스로 발광해 사실적이고 풍부한 색을 묘사한다. 특히 일반 TV보다 완전한 검은색을 표현해낸다. 아캄프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상영되는 다매체 영상 작품에서는 구조적이고 선명하게 색을 표현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 기술이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런던=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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