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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서도 힘든 여성 연출가의 길, 수많은 '심청'의 희생으로 내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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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17~20일 국립오페라단이 45년 만에 전막을 올린 독일 작곡가 바그너의 '탄호이저'. '한국은 바그너의 불모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그너의 작품은 국내 무대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않지만, 사실상 초연인 이번 공연은 "보기 드문 볼 만한 프로덕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직전 공연은 1979년의 한국어 번역 공연이었다.
일등공신은 중세 유럽이 배경인 원작에서 벗어나 시대를 특정하지 않은 이야기로 재해석한 요나 김의 현대적 연출. '탄호이저'는 육체적 세계를 상징하는 베누스와 정신적 세계를 상징하는 엘리자베트라는 두 여성 캐릭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13세기 기사 탄호이저를 통해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개인적 욕망 사이의 딜레마를 다룬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연출가 요나 김(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연출가)은 베누스와 엘리자베트를 양극단의 캐릭터가 아닌 한 여성 안에 내재된 양면성처럼 그렸다. 전형적인 바그너 작품의 극단적 여성상을 버리고 두 여성 캐릭터가 연대하는 듯한 장면을 넣었고, 무대 위 실시간 카메라로 인물 심리의 섬세한 변화를 포착해냈다.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김 연출가는 "캐릭터를 재해석한 건 바그너에 대한 애증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 캐릭터를 바꿨다고 바그너를 혐오하냐고 묻는데 오히려 반대"라며 "누군가를 진짜 사랑해야 나쁜 점도 알 수 있듯 바그너를 깊이 파고들다 보니 문제의식도 갖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5년 독일에서 오페라 연출가로 데뷔한 김 연출가는 독일 최고 권위의 극예술상인 '파우스트상'에 2010·2020년 두 차례 후보로 올랐고, 2017년 오페라 전문지 오펀벨트의 '올해의 연출가'로 선정된 베테랑이다. 바그너는 이번이 9번째 연출작이고, 한국 오페라 연출은 2015년 국립오페라단의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이후 9년 만이다. 그는 "그사이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관객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대적 연출이 한국 관객 정서에 안 맞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수준 높은 한국 관객은 직관적 무대라면 어떤 종류의 해석이든 충분히 받아들여 줄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했다.
"한국만 생각하면 늘 애틋하다"는 김 연출가의 다음 한국 무대는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가 공동 제작해 내년 8월 공개하는 판소리극 '심청'이다. 20년 가까이 유럽에서 활동한 그는 "내 정체성을 반추하면서 뒤늦게 판소리를 접한 이후 판소리가 중심이 되는 극예술을 꼭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페라 대본가로도 활동하는 그는 '심청가'의 여러 창본과 영역본까지 검토해 '심청'의 대본 작업을 마쳤다.
'심청'은 2026년 유럽 공연을 염두에 둔 대형 프로젝트다. 딸을 제물로 바치는 그리스 비극을 비롯해 딸의 희생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이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 서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 연출가는 "'심청'처럼 자기 언어 없이 사라진 딸들의 피땀으로 오늘날 여자들이 리더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 것"이라며 "내가 유럽에서도 주로 남성들이 많이 하는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수많은 심청이 있어 가능했다"고 말했다.
김 연출가는 '탄호이저' 준비 과정에서 한국 공연 스태프의 높은 수준에 감탄했다. 그래서 성악가뿐 아니라 제작진까지 모두 한국인으로 꾸린 프로덕션으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한국에서 연출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한국 문학을 오페라로 옮긴 창작 오페라도 써서 연출하고 싶다고 했다.
"'심청'을 준비하면서 고고학자가 유적을 찾듯 여성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저의 뿌리를 되짚어 보고 있어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서 보듯, 뛰어난 한국 문학을 언젠가는 꼭 오페라 무대로 옮겨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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