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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金→IOC 선수위원→체육대통령... 유승민의 대반전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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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제42대 대한체육회장선거에서 체육회장에 당선된 유승민 전 대한탁구협회장이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하고 있다. 뉴스1
또 한 번 '반전 드라마'를 쓴 이가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에서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중국 만리장성을 무너뜨린 선수가, 20년 후 한국의 '체육대통령' 선거에서 대이변을 일으키며 사상 최연소로 대한체육회장에 당선되는 역사를 썼다. 그 주인공은 유승민(42) 체육회장 당선자다.
유 당선자는 16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당선 기자회견을 열고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무거운 책임감이 들었다"며 "체육계의 녹록지 않은 현실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었다. 어떤 리더가 될지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여드린 과정보다 2, 3배로 진정성을 보이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역대 훌륭한 체육회장님들이 계셨지만 그분들이 끌고 오셨던 것을 뛰어 넘어서 최고로 부지런한 체육계 일꾼이 되겠다"며 "만약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이면 채찍질도 해달라"고 당부했다.
'발품의 달인', 대이변의 주인공으로
지난 1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제42대 대한체육회장선거에서 이기흥(왼쪽부터), 김용주, 유승민, 강태선, 오주영, 강신욱 후보가 참석해 있다. 뉴시스
유 당선자가 체육회장으로 뽑힌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는 지난 14일 열린 체육회장 선거에서 유효 투표 수 1,209표 중 417표(득표율 34.5%)를 얻어 '3선 연임'에 도전한 이기흥 현 회장(379표·31.3%)을 단 38표 차로 밀어내고 당선됐다. 후보로 나섰던 강태선 서울시체육회장(216표)과 강신욱 단국대 명예교수(120표), 오주영 전 대한세팍타크로협회 회장(59표), 김용주 전 강원도체육회 사무총장(15표) 등 5명의 후보를 제치고 사상 최고 경쟁률을 뚫었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이 회장의 우세가 점쳐졌다. 사상 처음으로 후보 6명이 체육회장 선거에 나선 데다 야권 후보 간 단일화가 무산되면서 8년간 체제를 구축한 이 회장의 3연임에 힘이 실렸다. 5명의 야권 후보가 경쟁을 벌이면 표가 분산되니 당연히 이 회장 쪽이 유리할 것으로 보였고, 유 당선자의 선전을 예상한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판을 깬 건 2030 젊은 유권자의 힘으로 드러났다. 엘리트 선수 출신인 유 당선자의 배경과 더불어 개혁과 변화를 앞세운 공약은 이들에게 기대와 신뢰를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선거인단은 역대 최다 인원인 2,244명으로, 이 중 40대 이하가 절반이 넘는 51.2%를 차지했다. 이 젊은 표심이 유 당선자에게 향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난 2016년 8월 브라질 리우데자이네루 올림픽 선수촌에서 유승민 당시 IOC 선수 위원 후보가 타국 선수들에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16년 8월 리우데자이네루 올림픽 선수촌에서 유승민 당시 IOC 선수 위원 후보가 타국 선수들에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지난 2016년 8월 리우데자이네루 올림픽 선수촌에서 유승민 당시 IOC 선수 위원 후보가 타국 선수들에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16년 8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폐막식이 끝난 뒤 IOC 선수 위원으로 당선된 유승민(오른쪽에서 두 번째) 후보가 토마스 바흐(오른쪽 세 번째) IOC 위원장과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특히 유 당선자의 발로 뛰는 선거운동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으로 보인다. 180개 이상 시·군·구 체육회를 방문하는 등 지난 201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 위원 선거 당시 발품을 팔았던 경험을 그대로 접목했다. 그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표를 얻기 위해 리우 올림픽이 열리기 10일 전에 브라질로 넘어가 세계 선수들을 대상으로 선거 유세를 펼쳤다.
총 23명의 후보 중 상위 4명만 당선되는 구조여서 인지도가 없던 유 당선자는 선수촌을 돌며 얼굴을 알리는 길밖에 없었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15시간 동안 선거 유세를 한 건 유명한 일화다. 결국 선수들이 먼저 와서 인사를 건네고, 음식까지 챙겨주며 응원을 보내준 일도 있었다. 2004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지만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 인지도가 낮았던 그는,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을 듯했던 IOC 선수 위원에 당당하게 뽑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스포츠 외교뿐 아니라 행정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선수촌장으로 임명된 이후 2018 평창기념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행정가로서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도전한 게 대한탁구협회장이다. 지난 2019년 5월 고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별세로 공석이 된 탁구협회장 보궐선거에 37세의 나이에 출마해 회장으로 당선됐다. 2020년 12월까지 탁구협회장을 하다가 이후 치러진 회장 선거에 단독 출마해 연임에 성공했다. 지난해 9월 체육회장 선거 출마를 하면서 5년 5개월간 재직한 탁구협회장 자리에서 전격 사임했다.
탁구 신동에서 불굴의 노력파로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탁구 남자단식 시상대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건 유승민(가운데)과 은메달을 딴 중국의 왕하오(왼쪽). 한국일보 자료사진
유 당선자는 어릴 때부터 '탁구 신동'으로 불렸다. 경기 부천시 내동중학교 시절 국가대표에 뽑힐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뽐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을 두고 실업팀들 간 스카우트 경쟁이 불붙었고, 한 기업이 후원까지 하며 공을 들였다. 그 무렵 1997 아시아 주니어 탁구 선수권에 출전해 단식 4강, 단체전 우승을 일구는 데 힘을 보탰다. 2년 뒤 이 대회에서 '숙명의 상대' 왕하오를 만나 탁구 남자단식 결승에서 제압하며 5년 후 예행연습을 하게 된다. 당시 복식 결승에서도 탕펑과 왕하오 조를 김정훈과 함께 꺾어 대회 2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유 당선자는 왕하오와 맞닥뜨린다. 왕하오는 준결승에서 당시 세계랭킹 1위였던 동료 왕리친을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해 그 어느 때보다 기세가 등등했다. 이 때문에 왕하오가 금메달감이란 말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유 당선자는 당시 김택수 대표팀 코치와 함께 올림픽 결승에서 왕하오와 만날 것에 대비, 그의 전매특허인 '이면타법' 기술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유 당선자의 노력은 허사가 아니었다. 결승에서 만난 왕하오를 상대로 김 코치와 훈련했던 기량을 눈부시게 펼쳐 보였다. 그 결과 세트 스코어 4-2로 제압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심기일전을 위해 까까머리로 짧게 헤어스타일을 바꾼 그가 매서운 눈빛으로 왕하오를 상대하던 모습은 많은 스포츠팬들 머릿속에 각인돼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탁구 남자단식 결승에서 중국의 왕하오를 꺾고 금메달이 확정되자 환호하는 유승민(왼쪽)과 김택수 코치.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가 왕하오를 꺾고 정상의 자리에 앉을 거라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당시에도 중국은 세계 최강이었고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한국 탁구는 1988 서울 올림픽 금메달 이후 16년간 올림픽 금메달이 없었기에 가능성은 더 희박해보였다. 그러나 철저한 훈련을 통한 준비는 배신하지 않았다. 유 당선자에게 '반전 드라마의 역사' '기적의 사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교훈을 재확인시켜줬다. 한국 탁구는 유 당선자의 금메달 이후 올림픽 무대에서 금맥이 끊긴 상태다.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단체전 동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단체전 은메달)에 출전한 이후 2014년 6월 은퇴를 선언,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유 당선자는 이번 선거에서도 왕하오와의 대결을 복기했다. 그는 지난달 후보 단일화가 불발된 것에 대해 "IOC 선수 위원에 도전할 때가 생각난다. 2004년 올림픽서 왕하오와 결승 때도 많은 분들이 쉽지 않을 거라 했다"며 "내 마음속엔 온통 체육인을 위한 민원 해결사가 되겠다는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또 "(이 회장이) 왕하오보단 안 셀 것 같다"며 해볼 만하다는 각오도 보였다.
그리고 선거에서 당선된 후에도 "스스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힘들 것이라 했다. 데자뷔 같았다"며 "길지 않은 시간 체육인들과 진심으로 소통했고, 유권자들에게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산적한 과제 어떻게 풀까
유승민 대한체육회장 당선자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제42대 대한체육회장 당선 기자회견'을 열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엘리트 선수 출신에서 IOC 선수 위원, 탁구협회장으로 활동하며 스포츠 행정에도 잔뼈가 굵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대가 높아졌지만 우려도 따른다.
우선 처리해야 할 당면 과제가 산적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의 얽힌 관계를 푸는 게 급선무다. 문체부는 이 회장 체재의 체육회와 갈등이 깊어지면서 예산을 크게 삭감했다.
이를 의식한 듯 유 당선자는 당선 기자회견에서 "유인촌 문체부 장관과 장미란 차관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두 분이 '관계가 많이 틀어진 상황에서 체육인들의 우려가 클 텐데, 말끔하게 해소하고 대한민국 체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확실히 지원하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하며 관계 개선의 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임기 중 치러지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2028 로스앤젤레스(LA) 하계올림픽 등 굵직한 대회에서 성과도 보여줘야 한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 48년 만에 선수단 최소 규모(144명)로 역대급 성적(금메달 13개)을 냈기에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최근 한국 스포츠의 국제 경쟁력이 저하된 상황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지가 관건이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회의실에서 유승민(가운데) 대한체육회장 당선자가 유인촌(왼쪽)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장미란 제2차관을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문체부 제공
탁구협회장 시절 불거진 의혹이 변수가 될 수도 있다. 스포츠윤리센터에 유 당선자와 관련한 신고가 여러 건 접수됐는데, 이 중에는 후원금 인센티브 수령에 대한 횡령·배임 문제가 있다. 또한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이른바 '국가대표 선수 바꿔치기' 등 의혹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스포츠윤리센터는 이들 문제에 대해 직권 조사를 마쳤다고 알려졌으며, 향후 센터가 문체부에 수사 의뢰 등을 요청할 경우 유 당선자의 거취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8년 간 체육회를 지휘한 이 회장이 비위 혐의 등으로 여론의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변화와 개혁을 위해 유 당선자를 선택한 체육인들의 표심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체육회의 떨어진 위상을 다시 끌어올리는 일이 남았다. 일단 체육회 노동조합은 유 당선자의 당선을 축하하고 나섰다. 체육회 노조 비상대책위원회는 17일 성명서를 내고 "2004 아테네 올림픽 탁구 남자단식 결승에 못지 않은 '올림픽홀의 기적'을 일궈낸 유 당선자에게 축하 인사를 전한다. 이제는 변화와 개혁의 시간"이라며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체육 환경 조성을 위한 개혁에 매진하고, 구성원들과 소통 및 직원들의 사기 진작과 처우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해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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