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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 공간서 베푸는 삶 시작됐죠"... 35년 한결같이 구두와 함께한 기부

입력
2025.01.31 05:30
23면

1990년부터 봉사·기부 실천 강규홍씨
구두수선사 모임 '관악녹지회' 회장
하루 꼬박 일해도 1만 원 벌지만
"적은 돈이라도 도울 수 있어 감사"

지난 연말 서울 관악구 자신의 구두수선점에서 강규홍씨가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구두를 고치고 있다. 권정현 기자

지난 연말 서울 관악구 자신의 구두수선점에서 강규홍씨가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구두를 고치고 있다. 권정현 기자


"봉사할 수 있어 감사하고, 한 번씩 찾아와 주는 손님 덕에 감사한 삶이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서울 관악구청 앞 한쪽에 자리 잡은 네모난 부스. 지난 연말 한 평(약 3.3㎡) 남짓한 공간에서 구두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닦던 강규홍(72)씨는 이렇게 말했다.

1990년 봄부터 구두를 닦았으니 구두와 함께한 인생이 어언 35년. 강산이 세 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 동안 구두닦이의 삶도 참 변화무쌍했다. 전성기 때는 구두만 닦아 가족을 먹여 살렸지만 이제는 직장인들도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는 세상이라 하루에 한두 켤레 닦기도 힘들어졌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기부가 곧 행복'이라는 강씨의 신념이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관악구 구두수선사들의 모임 '관악녹지회'는 지난해까지 36년간 총 1억3,900만 원을 기부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강씨는 "구두를 신지 않는 시대에 찾아와 주는 손님 한 명 한 명이 감사하다"며 "적은 돈이라도 계속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감사한 삶"이라고 말했다.

관악녹지회는 1990년 서울 관악구에서 구두수선점을 운영하던 40여 명의 구두수선사들이 만든 단체. 동종업계 사람들이 고된 노동의 애환을 털어놓는 친목 모임이었지만 강씨가 "함께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구두닦이라며 무시와 천대를 받기 일쑤였던 시절에 "우리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며 나선 것이다. 그해 서울에서 손꼽혔던 '달동네' 난곡동 등에 연탄을 배달했고, 홀몸 노인과 소년소녀가장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이후 35년 동안 기부와 봉사를 이어왔는데, 이런 삶은 자신의 과오에서 비롯됐다. 강씨는 "철없던 시절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다 사고를 냈다"며 "합의금과 보상금으로 전 재산을 날려 아내 배 속에 있던 둘째까지 네 식구가 거리에 내앉았다"고 털어놨다.

사업이 망해 발길 닿는 대로 일거리를 찾던 중 서울 영등포구청 앞 구두수선 부스에 수북이 쌓인 구두를 보고 사장에게 일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했다. 일당 2,000원을 받고 온종일 구두를 닦고 고치는 생활이 시작됐다. 강씨는 "손바닥 곳곳에 물집이 생기고 어깨 감각이 사라질 정도였다"며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쉴 수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강규홍씨가 운영하는 서울 관악구의 구두수선점. 권정현 기자

강규홍씨가 운영하는 서울 관악구의 구두수선점. 권정현 기자

밤낮으로 일해 번 돈으로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구두수선점을 차렸다. 1990년대에는 구두가 하루에 100켤레 넘게 들어올 정도로 번창했다. 그렇게 삶의 터전이 됐지만 요새는 10시간을 꼬박 일해도 1만 원 겨우 버는 날도 있다. 설상가상 관악녹지회 회원도 점차 줄고 있다. '늙어서' '몸이 아파서' '수입이 없어서' 등의 사유로 일을 그만두는 탓이다.

그래도 강씨는 매일 아침 출근해 구두를 잡는 동력은 '사람'이라고 했다. 20년 전 간암을 앓다 세상을 떠난 한 서울대 학생의 모친은 가장 뜻깊은 인연으로 남았다. 관악녹지회는 당시 이틀간 번 돈을 학생의 수술비로 기부했다. 학생은 숨졌지만 그의 모친은 약 10년간 매달 강씨의 수선점을 찾아와 구두를 맡겼다고 한다. 강씨는 "이 누추한 곳을 방문해 그 학생의 동생이 대학에 입학했고, 결혼했다는 둥 소식을 전해 주실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더라"며 "조그마한 선행으로 큰 인연을 얻고, 구두를 닦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 일상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는 게 참 특별하지 않느냐"며 미소 지었다.

권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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