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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들어 죽어가는 딸을 살린 건… 돈이 아닌 '소설'이었다

입력
2025.01.24 20:0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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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눈 내리는 삼일포'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조선 화가 심사정(1707~1769)의 서화 '삼일포'. 벌레가 갉아 먹은 흔적인 하얀 점이 눈 내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간송미술관 제공

조선 화가 심사정(1707~1769)의 서화 '삼일포'. 벌레가 갉아 먹은 흔적인 하얀 점이 눈 내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간송미술관 제공

소설은 사실 그 자체로 뾰족한 쓸모가 없는데도 꾸준히 쓰이고 읽힌다. 때로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예를 들면, 병에 걸려 곧 죽을 아이를 살릴 약재를 돈 한 푼 없이도 얻어낼 힘 같은 것. 소설가 김연수의 현대문학 70주년 기념호에 실린 단편소설 ‘눈 내리는 삼일포’는 이런 소설의 가치와 힘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1790년대의 조선, 궁궐 어의인 ‘나’에게 “몹시 빈한한 집안”의 ‘덕암’이라는 남자가 찾아오며 시작된다. 덕암은 올해 열 살인 막내딸이 학질(말라리아)에 걸렸다면서 “아이를 살려달라”고 호소한다. “여염의 병자를 다루지 않는다”는 나의 거절에도 그는 왕세손이 학질에 걸렸을 때 ‘귀한 약’으로 구한 사실을 알고 있다며 매달린다. 왕세손을 살린 약재인 ‘금계근’은 서양에서만 자라 중국에도 들어오는 양이 극히 적어 조선에서는 구하기 힘들기에 나는 거듭 고개를 젓는다.

덕암은 “직접 제 눈앞에서” 그렸다면서 내가 푹 빠진 화가 ‘선재’의 그림을 내놓지만, 여기저기에 좀이 쏠아 구멍이 숭숭 뚫린 채다. 제대로 된 그림이 아니라며 혀를 차는 나에게 그는 “망가진 그림이 아니라 선재가 일생의 깨달음을 넣어 완성한 그림”이라고 주장한다. 역적의 손자로 모든 것을 잃은 선재가 “세상이라는 그림에 갇혀 스스로 만든 지옥”에서 벗어났다며 금강산 삼일포를 그리고 여기에 직접 구멍을 뚫었다는 것이다. 덕암은 이 이야기와 함께 선재의 깨달음을 전한다.

“이렇게 구멍이 뚫리면 그림 속의 사람은 이 구멍을 이해할 방법이 있겠는가? 지금 인생의 풍파에 흔들리고 있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게나. 빛은 거기로 스며드는 것이니까.”

김연수 작가. 문학동네 제공 ⓒ이관형

김연수 작가. 문학동네 제공 ⓒ이관형

언뜻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선재의 그림은 이 이야기를 통해 ‘걸작’으로 완성된다. 나는 결국 그림을 받고 덕암에게 약을 내어주나 ‘눈 내리는 삼일포’는 결말에 이르러 선재의 일화가 지어낸 소설일 가능성을 암시한다. 평소 사람을 미혹한다는 이유로 소설을 싫어하던 덕암이지만, 결국 그 미혹이 딸을 살린 셈이다.

누군가는 소설을 두고 꿈과 허황한, 믿을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허비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 작가는 이런 소설과 소설을 쓰는 마음은 시간이 지나 밀알처럼 쌓이며 느닷없이 기적처럼 바뀐 세상을 보리라고 믿는(산문집 ‘소설가의 일’) 사람이다.

소설 ‘눈 내리는 삼일포’ 역시 현실의 이야기가 쌓이고 쌓인 끝에 만들어졌다. 간송미술관은 조선의 화가 심사정의 그림 ‘삼일포’를 보존하면서 벌레가 갉은 흔적을 완전히 메우지 않았다. 이를 관람객이 눈 내리는 풍경으로 본 까닭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수지 작가는 쌓인 눈으로 온통 하얀 세상이 되어 마침내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그림책 ‘눈 내리는 삼일포’를 만들었다. 이어 김 작가는 이 그림책을 본 순간부터 이 소설은 쓰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쌓아왔고 또 앞으로도 쌓일 이야기들을 향한 소설가의 헌사인 셈이다.

전혼잎 기자
이.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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