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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 상태가 증명할 기회다

입력
2025.01.27 04:30
수정
2025.01.27 12:16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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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간섭 권력자들 사라지니
외압 없어 조직 더 잘 돌아가
검·경 진정한 독립기관 돼야

윤석열 대통령 2차 체포영장 집행에 나선 경찰이 15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철수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윤석열 대통령 2차 체포영장 집행에 나선 경찰이 15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철수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구순을 넘긴 현역 최고령 연기자인 이순재가 올해 초 ‘KBS 연기대상’을 수상해 주목받았다. 연극 '리어왕' 무대에도 올랐던 이순재는 언론 인터뷰에서 "리더는 군림하지 않고 밑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자기 위치에서 자기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없는 사람도 안고 가야 한다"고 얘기했다.

조직 생활을 오래 해본 사람들은 안다. 군림하고 부당하게 간섭하려는 리더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그런 리더는 심지어 자기가 없으면 조직이 안 돌아갈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군림하는 리더가 없어진다고 조직이 망가지는 일은 없다. 시스템만 잘 갖춰져 있다면 그가 사라지는 순간 오히려 조직은 더 잘 돌아간다.

우리나라도 지금 리더가 사라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 계엄 선포 이후 대한민국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다. 정부 운영을 책임지는 대통령은 내란 우두머리로 지목돼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한덕수 국무총리와 검찰 출신인 박성재 법무부 장관은 탄핵됐다. '대통령 오른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자리에서 물러났고 조지호 경찰청장은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과 경찰에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리더십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계엄이 선포되고 해제된 지 50일이 지났는데도 '예상과 달리' 두 조직에 큰 동요가 없다. 현직 대통령 수사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고, 조직 내부에 큰 갈등이나 잡음도 표출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리더가 사라진 지금 상황을 반기는 구성원도 적지 않다.

대통령과 권력자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되자 역설적으로 조직이 안정된 이유는 뭘까. 검찰과 경찰 수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간 인사권자의 눈치를 보는 일이 잦았다. 일반 행정부처 수장은 국정 철학 공유를 명분으로 최고 권력자와 정치권의 의중을 살필 수 있지만, 수사기관은 시스템대로 돌아가는 게 훨씬 중요하다. 두 기관이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입버릇처럼 외쳤던 이유다. 하지만 말끝마다 법과 원칙을 들먹이는 것은 법과 원칙대로 안 되고 있었다는 증거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정상적으로 수사했다면 나올 수 없는 결과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지 않나.

검찰과 경찰 수장들이 수십 년간 권력자의 부당한 간섭을 제대로 물리치지 못하다 보니, 차라리 리더가 없으면 조직이 더 잘 돌아갈 것이란 얘기마저 나왔다. 정치인 출신이나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법조인들이 법무부 장관으로 오면 검찰 수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대통령 뜻에 거스르지 않고 출세욕에 사로잡혀 하명수사나 야당 인사들 수사에 앞장선 검찰총장도 있었다. 경찰은 검찰보다 훨씬 권력에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역대 경찰청장 가운데 형사처벌을 받지 않은 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개인비리로 구설에 오른 이들도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권력자와 거리두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무정부 상태가 된 지금이 검찰과 경찰 입장에선 진정한 독립기관으로 자리 잡을 절호의 기회다. 사심을 갖고 수사에 간섭하려는 권력자도 없고, 부당한 지시를 전하려는 조직 수장도 사라졌다. 사실상 법과 원칙밖에 기댈 게 없다. 리더 없이도 수사했던 성과물들은 그 자체로 역사적 유산이다. 또한 향후 누가 수장으로 오든 묵직한 경고가 될 것이다. 군림하는 리더는 없느니만 못하다.

강철원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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