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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국 미국이 첨단무기를 베트남에 두고 온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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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이공의 전쟁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미군 군사 장비들. flickr 사진
국제사회가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중국-베트남 전쟁(1979.2.17~3.16)’을 중국은 ‘대월자위반격전’이라 명명했고 베트남은 ‘대중국 팽창주의 전쟁’이라 부른다. 당시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 주석은 ‘교육적 전쟁(pedagogical war)’이라 불렀다. 베트남이 구소련과 조약을 맺고 캄보디아를 점령한 데 대한 교육적 응징이란 의미. 덩 전 주석은 “말을 안 듣는 아이는 엉덩이를 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베트남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후에도 중국에 대한 오랜 감정적 앙금이 가신 건 아니었다. 화교 상권을 탄압하던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해 친중국계인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베트남계 헹 삼린 정권을 옹립했다. 앞서 베트남 공산당은 69년 중소 국경분쟁 당시 소련을 지지했다.
급기야 중국은 79년 2월 베트남을 침공했다. 주력부대를 캄보디아에 배치하고 있던 베트남은 퇴역 베테랑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주축으로 국경수비대와 일부 정규군만으로 중국의 공세에 맞섰다.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군엔 풍부한 실전 경험과 지형 전술의 이점이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이 남기고 간 전차와 경전투기, 야포 등 중국군의 무기를 압도할 만한 첨단 무기들이 있었다. 75년 패전한 미국은 북베트남과의 비밀 협상을 통해 당시 기준 50억 달러 규모의 무기들을 베트남 측에 넘겼다. 당연히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베트남 동북부 일부 지역을 점령한 뒤 베트남군과 대치하던 중국은 캄보디아의 베트남 주력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합류하던 3월 6일 “군사적 징벌 완료”를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철수를 시작했다.
양측은 모두 승전을 선전했지만 국제사회는 중국이 사실상 패배한 전쟁이라고 평가한다. 중국은 저 전쟁에서 2만3,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 실제로 얻은 게 없었다. 베트남 측 사상자는 3만여 명에 달했지만 약 1/3은 민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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