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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형 오너' 故성완종 전 회장은 누구

입력
2015.04.09 18:09

13세 때 상경 배추 운송업 성공 뒤 경남기업 등 인수

여의도 입성까지 승승장구… "누가 뒤 봐 줄 것" 파다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성완종(64) 전 경남기업 회장은 맨손으로 부를 거머쥔 ‘자수성가형 오너’, 그리고 남다른 처세술로 국회 입성에도 성공한 ‘인맥의 귀재’로 통했다.

그가 가장 먼저 이름을 알린 건 건설업계에서다. 1951년 충남 서산 해미에서 태어난 성 전 회장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를 하고 13세 때 서울로 올라와 신문배달 등을 하며 100만원을 모았다. 이 종자돈으로 23세에 배추 화물운송업을 시작해 단번에 성공을 거뒀고 이듬해인 1975년 건설업계에 뛰어들어 1982년 대아건설, 2003년 경남기업을 차례로 인수하면서 일약 대기업 오너로 등극했다.

학연 지연 등에선 내세울 것이 없던 그가 택한 것은 충청권 인맥 관리였다. 2000년 충청도 출신 정ㆍ관계 인사와 언론인들로 구성된 ‘충청포럼’을 출범시켰고, 지금껏 회장으로 있으면서 인맥 관리에 공을 들였다. 지난 40년간 자신의 생일과 명절날을 빼고는 거의 매일 각계각층의 인사와 조찬을 함께했고, 외우고 있는 인사들의 전화번호가 1,000개가 넘는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였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뒤 성 전 회장이 눈길을 돌린 곳은 정치권이었다. 2000년 16대 총선(자민련 공천 탈락), 2004년 17대 총선(자민련 후보 낙선)에서 쓴맛을 봤지만, 2012년엔 자유선진당 후보로 나와 충남 서산ㆍ태안에서 당선됐다. 이후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힘있는 여당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정치인의 꿈을 이루자마자 지난해 6월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이 박탈됐다. 2012년 총선 전 지역 주민한테 무료로 음악회를 보여준 혐의였다.

그는 정치인으로의 삶은 매우 짧았지만, 사업가로선 역대 정권 때마다 승승장구했다. 숨지기 하루 전인 8일 성 전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MB(이명박 전 대통령)맨이 아니다. 어떻게 MB정부 피해자가 MB맨일 수 있겠나”고 했지만, 그는 이전 정권뿐 아니라 참여정부에서도 “누군가 뒤를 봐 주고 있는 것 아니냐”는 구설에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명박 정권에서만 2차례(2009년, 2013년)나 워크아웃 대상에 올랐던 경남기업은 채권단의 전폭적인 금융지원으로 기사회생했고, 성 전 회장은 대통령 해외순방을 9차례나 동행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불법 정치자금 혐의와 배임 증재 혐의로 두 차례나 징역형을 선고 받았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법조계 안팎에선 성 전 회장을 ‘불사신’으로 불렀을 정도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성 전 회장은 정반대 처지가 됐다. 경남기업은 채권단의 외면을 받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자신은 자원외교 비리수사의 핵심 인물로 꼽히면서 벼랑 끝에 몰렸다. 그는 결국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이 예정된 9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어머니 묘소에 묻어달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성 전 회장은 지난해 5월 한 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나의 젊은 시절의 경험은 생활자세부터 종교적 신념까지 굳건하게 했는데 그 중심은 어머니였다”며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효심을 드러냈다.

강아름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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