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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나고, 해지고, 고장 난 것들과 관계맺기 기술을 알려주는 반짇고리

입력
2024.11.23 04:30
24면

<187> 망가진 세계에서 망가진 것들과 살아가는 법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서한영교 작가가 격주로 글을 씁니다.

22년 된 작가의 낡은 패딩점퍼. 이 옷은 한겨울 작가의 자녀도 감싸줬다. 서한영교 작가 제공

22년 된 작가의 낡은 패딩점퍼. 이 옷은 한겨울 작가의 자녀도 감싸줬다. 서한영교 작가 제공




“사물들에 대한 변함없는 우정이.”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중에서

추워지면서 겨울옷들을 꺼냈다. 봄, 여름, 가을 동안 캄캄하게 말려 있던 패딩 점퍼를 꺼냈다. 22년째 함께 겨울을 보내고 있는 패딩 점퍼 곳곳에 바느질 흔적이 가득하다. 모자 쪽, 소매 쪽, 주머니 쪽, 지퍼 쪽 어디 한 곳 손보지 않은 곳이 없다. 매년 겨울의 시작은 한 벌뿐인 패딩 점퍼를 수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역시 올해에도 패딩 점퍼 아랫부분이 헐어 작게 찢어져 있다.

모계적 혈통을 잇는 반짇고리

서한영교 작가가 22년 입은 패딩을 수선할 때마다 꺼내드는 반짇고리. 서한영교 작가 제공

서한영교 작가가 22년 입은 패딩을 수선할 때마다 꺼내드는 반짇고리. 서한영교 작가 제공

장롱 안에 넣어둔 받짇고리를 꺼냈다. 찢어진 것을 고치려 할 때, 비로소 그 사물과 둘러싼 연결망이 드러난다. 반짇고리를 열면 돌아가신 할머님의 유품을 정리하다 장롱 안에서 꺼내온 바늘, 어머니 반짇고리에서 가져온 자수바늘, 장모님 댁에서 받아온 쪽가위, 이모들에게서 받아온 실타래, 누나들에게 선물 받은 실까지. 반짇고리 안에는 살림을 돌보던 주변 여성들에게 받아온 사물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다. 작지만 이 확실한 연결망들이 나의 모계적 혈통을 잇고 있다. 찢어진 패딩을 수선하기에 적합한 바늘과 실을 골라, 바늘귀에 실을 꿰었다.

버리고 새것 사

한 땀, 두 땀 바느질을 하면서 나의 패딩 점퍼를 두고 한 마디, 두 마디씩 하던 목소리들이 떠오른다. "왜 이렇게까지 해? 구질구질해. 내가 돈 줄까? 내가 입던 거 줄까?" 그중에서도 가장 흔하게 들었던 말은 "버리고 새것 사"였다. 맞다. 버리고 새것 사는 게 합리적이다. 정성을 다해 수선할 시간에 클릭 한 번이면 도착하는 새 패딩 점퍼 하나 사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어쩌면, 그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중고로도 팔 수 없을 만큼 탄성을 잃은 낡은 패딩 점퍼를 이렇게까지 아껴야 할 이유는 그렇게 많지 않다. 99가지의 버려야 할 이유를 댈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단 하나의 느낌이 내게 있다. 사물과 우정을 나누고 있다는 느낌.

사물과의 우정

이 느낌은 사물에 대한 통상적인 소유욕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다. 모든 것을 화폐화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소비, 소유하는 대상인 ‘상품’에 대한 욕망과는 다른 느낌이다. '상품'으로 닫혀있고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맥락에 따라 생동하는 '열린 존재', 즉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을 허용하는 열린 집합체"(주디스 버틀러)로서 비인간 사물-동료로 만난다. 바늘과 실은 패딩 점퍼를 '얼마짜리' 상품이 아니라, 긴밀한 우정을 다져나가는 사물-동료로 만나게 한다.

바늘과 실로 패딩 점퍼를 수선할 때, 내가 사물을 "구원하는 것 못지않게, 나는 사물들을 보면서 나를 구원한다."(모리스 블랑쇼) 인간이 아닌 것을 타자화하는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사물은 나를 구원한다. 생명이 아닌 것을 타자화하는 생명 중심주의로부터 나를 구원한다. 망가지고, 구멍 나고, 찢어지고, 해지고, 고장 난 인간/비인간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에 골몰하게 한다. ‘사물에게 나는 괜찮은 동료인가’ 묻게 하고, 비인간 존재들과 새로운 관계 맺기의 재배치를 도모할 수 있게 한다. 이게, 어쩌자고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죽음의 바느질 클럽

작가 복태와 한군의 저서 '죽음의 바느질 클럽'. 출판사 마티

작가 복태와 한군의 저서 '죽음의 바느질 클럽'. 출판사 마티


패딩 점퍼를 수선하다가 '죽음의 바느질 클럽'이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이 책에는 '수선하는 삶은 단순히 바느질하는 행위를 넘어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여기는 작가 ‘복태와 한군’의 바느질 이야기와 다양한 수선기법, 수선 사례들이 담겨있다. 홈질, 박음질, 감침질, 스티치, 직조자수, 이 다섯가지 바느질로 꿰맬 수 있는 세계가 얼마나 광활한지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책을 넘겨보다가, ‘돌돌 감아 꿰맨다’하여 이름 붙여진 감침질로 수선을 해보기로 했다. 찢어진 부분을 한 땀 한 땀 돌돌 감아 꿰매다 보니 찢어졌는지도 몰랐던 내 마음 한쪽도 함께 꿰매지는 것만 같다.

이들 수선법의 특징은 수선한 자리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티나게' 한다는 것에 있다. 수선한 흔적을 팍팍 티내는 수선된 자리는 사물과 인간이 나눈 우정의 흔적처럼 빛이 난다. 끈적끈적하게 사물과의 우정을 드러냄으로 사물-인간 사이를 잇는 상호 돌봄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탐욕스러운 소유자가 아니라 정성스레 서로의 삶을 촉발하는 사물들과의 우정에 소홀해지지 않기 위한 다양한 바느질 방법이 이 책 안에 가득 들어있다.

바라건대 부디

이 책의 부제는 '모쪼록 살려내도록'이다. 부사 ‘모쪼록’은 "바라건대 부디"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정한 마음의 형태가 담겨있는 ‘부디’에는 돌보는 마음도 함께 담겨있는 듯하다. 작가 ‘복태와 한군’은 “수선이 무언가는 ‘위하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를 위하는 마음, 지구를 위하는 마음이 다른 마음들에 앞선다. 한 치 앞뿐 아니라 조금 더 먼 앞을 내다보는 마음이다”라고 전한다.

양말에 구멍이 났을 때. 로봇 장난감 다리가 부서졌을 때. 입고 있던 점퍼에 불똥이 튀어 얼룩을 남겼을 때. 바로 그때, ‘모쪼록 살려내도록’하는 마음은 구멍 나고, 부서지고, 얼룩진 사건을 질문으로 바꾸어놓는다. 쓰레기가 되어버리고 마는 망가진 사물의 ‘죽음’이 아니라, 망가진 사물과의 ‘생동하는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망가진 것들을 돌보며 한 땀 한 땀 기워나가는 존재론적 기술을 당신은 익힐 준비가 되었는가? 패딩 점퍼를 꿰매며 찢어진 사물들이 던지는 질문에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응답해나갔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 우정이 꿰매져있다.

아들에게 전하는 아빠의 반짇고리

작가가 '어린이 반려자'라 부르는 작가의 아들이 해진 손수건을 잘라 만든 토끼인형 옷. 서한영교 작가 제공

작가가 '어린이 반려자'라 부르는 작가의 아들이 해진 손수건을 잘라 만든 토끼인형 옷. 서한영교 작가 제공

내가 패딩 점퍼를 수선하는 모습을 보던 어린이 반려자는 반짇고리에서 실과 바늘을 꺼내 토끼 인형의 옷을 짓기 시작했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니, 토끼 인형도 분명히 추울 것이라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자기 옷장을 뒤져 해진 손수건을 잘라 토끼 인형 체형에 맞게 재단한 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내 옆에서 바느질 놀이를 해 와서 그런지, 홈질하는 솜씨가 이제는 제법 촘촘하다. 어린이 반려자는 틈틈이 자신이 필요한 것이나 고쳐야 할 것이 있을 때, 장롱을 열어 나의 반짇고리를 가져가곤 한다.

내가 돌보는 반짇고리 뚜껑에는 아빠로 보이는 수염이 긴 토끼가 아기 토끼를 번쩍 들어 올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몇 해 전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영국의 페미니즘 연구자가 나에게 줄 선물을 고르다가 쿠키 통에 그려진 이 그림을 보고 딱, 이라며 골랐다고 했다. 쿠키를 다 먹은 뒤 이 통의 쓰임을 두고 나는 반짇고리로 딱, 이라고 여겼다. 살림을 돌보는 사물들(세탁기, 냉장고, 청소기...)이 그러하듯 ‘바늘과 실’에 깃들어 있는 가부장적 감각의 배치에 벗어나도록 요청하는 사물-페미니스트-동료로 삼기에 더 할 것 없이 딱, 좋은 반짇고리였다.

나의 반짇고리가 아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아빠의 상큼한 유산이 되기를 희망한다. 반짇고리에 담긴 굳은살 박인 모계적 전통에 따라 구멍 나고, 해지고, 고장 난 것들과의 관계 맺기 기술을 익히며 비인간 사물들과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물-동료들과 우정을 나누는 ‘구질구질한 아름다움’을 이 반짇고리가 가르쳐 줄 것임에 틀림없다. 망가져가는 세계에서 망가진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난잡한 근사함’을 이 받짇고리가 알려줄 것이다.

사물 핏줄

패딩 점퍼 수선을 마쳤다. 옷걸이에 걸어 바람이 드는 창가에 걸어놓고 수선한 자리를 쓰다듬었다. 피부 위로 슬쩍 솟은 핏줄 같다. 어쩌면 이것과 나는 수상하고 기묘한 핏줄을 나눠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쓰다듬으며 고맙고, 미안하고, 자랑스럽고, 안쓰럽고, 아름답고, 구질구질하고, 근사하고, 애달픈 마음의 두께가 두껍게 쌓여있음을 느낀다. ‘이번 겨울도 함께 무사히 지내봅시다. 22년간 저와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물들 곁에 머무름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중에서

서한영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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