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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동남풍은 무속이 아니었다

입력
2025.01.07 00:00
27면

K웨이브에 찬물 끼얹은 K정치
덩치 커졌지만 시스템은 취약
허물벗는 뱀처럼 혁신 이뤄야

영화 '적벽대전'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적벽대전'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1,800여 년 전 동지 무렵, 양쯔강 중류 후베이성 어딘가에서는 위와 촉, 오 군사들이 대치 중이었다. 적벽대전이라고 회자될 전쟁을 앞두고 있었는데, 적벽에선 동지 때 동남풍을 보기가 어려웠다.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했던 대로다. 화공은 바람을 등져야 불이 적진으로 퍼져가는데, 북서풍이 부는 절기에 화공을 하다가는 오히려 촉·오 군이 당할 위험이 있었다. 제갈량은 칠성단을 세웠다. 18세 미만의 소년 120명에게 흰옷을 입히고 흰 깃발을 들고 제단 주위를 돌게 하였다. 자신은 단상에 올라 주문을 외웠다. 비장한 무대 뒤로 간절했던 동남풍이 불어왔고, 전쟁의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북서풍이 주로 부는 절기에도 며칠에 한 번은 동남풍이 온다는 것을 현지인들은 경험으로 알았을 것이다.

음식, 영화 등 K시리즈가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모두가 기다렸던 오징어게임 시즌2가 선보일 즈음 K정치가 갑자기 떴다. 한밤 비상계엄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엊그제는 법원 영장이 집행되느냐 안 되느냐를 놓고 외국 기자들이 자국 TV에 종일 예측을 내보냈다. 당연한 일은 막히고, 황당한 일은 터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K정치에 다들 놀라고 있다. 우리의 민낯도 여실히 드러나 버렸다. 과거 일이 아닌 현재진행형인 게 더 안타깝다. 심각한 출생률에 한국이 없어질 것을 우려했던 외국 지인들이 이제는 한국이 두 동강 나지 않을까 걱정해준다. 진행 중인 비극적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연, 조연 중에 유난히 무속과 연관된 이가 많다. 심지어 본인이 무속인이라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조차 떠돈다. 물론 극히 일부만 사실일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사회적으로 비중 있는 분들이 무속과 관련 있다는 보도가 연일 나오는 게 놀랍다.

그 옛날 적벽에서 공명이 연출했던 것은 눈속임이었지 도술이나 무속은 아니었다. 후대에 과학으로 정립된 데이터 활용이었다. 무속 논란을 보면, 우리가 과연 그 시절보다 더 합리적으로 살고 있는가에 회의가 든다. 도박을 할 때 행복 호르몬이라는 도파민이 분출된다고 한다. 이길 때뿐만 아니라 질 때도 나온다고 한다.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긴장감과 도박판에서 겪는 간헐적 보상 경험이 도파민을 터지게 만든다. 무속에 의지하는 것도 비슷한 메커니즘이 아닐까 싶은데, 무속을 탓하지 말고, 왜 이렇게 무속이 우리 사회에 퍼지는지를 살펴야 할 때다.

오지선다 시험으로 대학에 가고, 소수점 이하 몇 자리에서 당락이 갈리는 것을 제일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회, 그렇게 결정된 대학은 학벌 카스트가 돼버리고, 수십대 일 경쟁의 입사 시험도 오지선다로 치르길 권하는 나라. 그 과정에서 요행을 바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입시나 취직과정만 그런 게 아니다. 승진도 그렇고 집값도 그렇고, 예측불가능한 일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보니 무속을 찾는 사람은 늘어날 것이다. 맞히든 못 맞히든 위안도 될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가 외형은 커졌으나 시스템은 아직도 취약한 탓이다. 구한말에도 진령군이라는 무녀가 지배층을 홀렸던 적이 있다. 왕실에서는 철도와 전기 등 선진 기술에 쓰는 예산 못지않게 무속행사에 돈을 써댔고, 그렇게 을사년을 맞았었다. 올해는 을사늑약 이후 120년 만에 맞는 을사년, 뱀의 해이다. 뱀이 허물을 벗듯 가죽을 새롭게 갈아입는 혁신은 요원할까





김세용 경기주택도시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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