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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자기소개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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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서한영교 작가가 격주로 글을 씁니다.
고통받고 있는 / 한 인간의 말
-에이드리언 리치 '아이들 대신 분서를' 중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에서 진행하는 집회 자유 발언대에 오른 사람들은 "투쟁!"으로 인사한 뒤 "안녕하세요, 저는 00입니다"라고 소개한다. 흔히 00의 자리에 이름, 나이, 사는 곳, 직업을 밝히는 자기소개와 달리 이곳 광장에서는 자기성격유형검사(MBTI)로는 담아낼 수 없는 소수적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성소수자, 페미니스트, 장애인, 여성, 비건, 전세 사기 피해자, 도시 빈민, 기초생활수급자, 비정규직 급식사, 탈학교 청소년, 이민자 2세, 광주의 딸, 노래방 도우미, 백수, 비혼… 다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름들이 바글바글했다. 광장에서 간절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말하고자 하는 소수적 이름을 가진 이들이 와글와글했다. 우리 사회의 아슬아슬한 자리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시간이자, 다양한 사람들이 여기 있으니 모두에게 안전한 광장이 될 수 있도록 애써보자고 보내는 신호이기도 했다. 정상·보편·평균의 역사에서 '나중에'로 밀려나던 소수적 이름들로 자신을 힘차게 소개했다.
소개를 뜻하는 영어 낱말 introduce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introducere는 안으로(intro)와 이끌다(ducere)로 맺어져 있다. 소개란 '내가 아닌' 것을 내 안으로 이끄는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소개란 초대의 장르다. 취약한 이름을 달고 살아가는 나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하는 셈이다. 내게로 들어오는 세계의 문을 당신에게 열 테니, 우리 함께 세계를 더 넓혀나가자는 소개·초대인 것이다.
이러한 자기소개는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며 '나'를 우리라는 단일대오에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르다"를 선언하며 책임감 있게 서로 응답하는 교차대오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서로 다른 이질적 정체성들이 와글바글한 이곳 광장에서 소수적 이름을 자기소개로 삼는 문법이 창발됐다.
특히 발언자들이 자신을 성소수자, 퀴어,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게이, 무성애자, 양성애자로 소개할 때마다 나는 정전기에 닿은 듯 찌릿찌릿했다.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을 듣는 일은 극히 드물기도 하고, 이들에게 커밍아웃은 일생일대의 '사건'임을 알기 때문이다.
처음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한 뒤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을 당했다던 동료 L, 커밍아웃한 뒤 주변 친구들로부터 쉴 새 없이 협박당했다던 동료 G, 나에게 귓속말로 커밍아웃한 뒤 세상이 잠길 듯 울던 동료 B, 커밍아웃했다가 살해 협박을 받고는 방 안에서 6년째 나오고 있지 않는 동료 T,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자신을 괴롭히며 자해를 일삼던 Q, 커밍아웃하기 위해 몇 년째 거울을 보며 연습하고 있는 +들이 떠올랐다. LGBTQ+들에게 '커밍아웃'은 폭력의 예감을 견뎌야 하는 다소 위험한 자기소개다.
그런데 자기자신을 밝히는 것만으로 폭력을 예감하도록 한국 사회에서 훈련받은 그들이 두려움과 공포를 덜어내고 광장 무대 위에서 커밍아웃하는 걸 들을 때마다 찌릿찌릿했다. 커밍아웃으로 자기소개하는 발언자를 향해 환호하는 응원봉이 물결칠 때마다 짜릿짜릿했다. 나도 페미니스트 응원봉을 힘껏 흔들었다.
누군가는 왜 성소수자, 여성 청년, 성 노동자, 정신장애, 비혼, 비건 등 자기 정체성을 이야기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한국에 페미니스트가 이렇게 많냐고, 퀴어들이 이렇게 많냐고, 우리 사회의 대표성을 담보해야 할 것 아니냐고 되물으며 여성과 퀴어들만 발언시킨다는 볼멘소리도 있었다. 윤석열 탄핵 표결을 앞둔 집회 발언 중 페미당당 활동가 심미섭이 광장 내 여성 혐오를 지적하며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퀴어'를 얘기할 때마다 야유를 보내거나 "끌어내려라"고 소리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듣기 싫다는 거다. 거사를 끝낸 뒤 나중에 이야기하라는 거다. 이때, 듣는다는 것은 정치적인 일이 된다.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우리가 듣기 시작했을 때, 이질적인 존재의 목소리는 우리를 '떨림'으로 진동하게 했다. 어떤 이는 흔들렸고 어떤 이는 기묘한 불안을 느꼈다. 듣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열림'으로 환해지기도 했다. 어떤 이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깼고 어떤 이는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았다. 귀 기울이면서 우리는 '울림'을 경험했다. 어떤 이는 감동받았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렸다. 떨림, 열림, 울림으로 진동하는 몸이 세계를 듣는 방식을 바꾸며 광장에서 혐오를 몰아냈다. 자기소개라는 사건과 듣는다는 사건이 만나면서 평등한 세계를 향한 열망, 누구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듣기의 공동체에서는 '공감'이라는 미지근한 감각이 아니라 '통감'이라는 직렬의 선명한 감각으로 서로를 연결한다. 공감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분명한 나·당신을 구분한 채 이루어지는 분리된 이해라면, 통감은 나와 당신을 이으며 포개는 감각이다. 통감은 너와 나의 포개짐이자, 서로에게 흘러 들어오고 흘러 들어가도록 드물게 발생하는 감각적 사건이다. 낯설고 이질적인 감각이 통하면서 이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공통 감각을 생동하게 한다. 그 감각적 사건들이 요즘 국회 앞에서, 남태령에서, 안국역에서, 광화문에서, 대통령 관저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통감의 감응은 사회적 통증에 대한 연민이 아닌 연대로, 동정이 아닌 공정으로, 차별이 아닌 평등으로 움직이게 한다. 그저 듣는 것만이 아니라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들며, 통감 속 '내가 아닌 것'과 포개진 '나'는 우리로 통하게 한다.
자유 발언대에 오른 사람들의 자기소개는 "서울시민이자, 대학생이자, 여성 청년이자, 페미니스트이자, 전세 사기 피해자이고, 캣맘이자, 해고노동자인 000입니다"로 이어지곤 했다. '~이자 ~이고'로 펼쳐지는 접속사 존재론을 기반으로 한 '나'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다양한 성분들을 소개했다.
'나'라는 공동체에는 여러 가지 이름들이 거주한다. 상황과 관계에 따라, 역할과 지위에 따라, 나이와 젠더에 따라 무수한 이름들로 분화된다. 누군가에게 불리고,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들이 '나'라는 공동체 안에서 경합하며 질문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단 하나의 본질을 찾는 관념적 질문이 아니라,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유물론적 질문을 하게 한다.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자기소개란 고정된 단 하나의 '나'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 중인 '나'에 관한 응답일 수밖에 없다. 소수적 타자들의 자리를 더 많이 마련할수록 '나'는 증폭된다.
광장 이후에 '나'들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기 시작할까. 남 보기 그럴싸한 이름, 보편타당한 이름, 손쉽게 이해되는 이름이 아니라 광장의 자기소개에서 배운 것처럼 낙인 찍혀있는 이름, 소수적 성분을 가진 이름, 남한테 말하기엔 부끄러운 이름, 취약한 이름, 자기소개를 할 때 하나 정도 넣어보면 어떨까.
자신의 소수적 성분을 드러내며, 미세한 정전기를 일으키는 찌릿찌릿한 자기소개의 정치를 실행시켜보면 어떨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소개가 아니라 '아니? 오잉? 여기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찌릿찌릿한 자기소개를 위한 소수적 이름 하나를 떠올려보자. 그 이름 안으로(intro) 이끌다(ducere) 보면 분명, 누군가는 혹은, 언젠가는 동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각자도생해야 하는 단독자로서의 '나'로 고립돼 버리는 것과 헤어져야 한다. '내가 아닌 것'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를 다시 만날 시간이다.
꾸밈없는 단어 하나가/ 핏덩이 속으로 들어가죠.
-에이드리언 리치 '아이들 대신 분서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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