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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노'의 비극적 결말

입력
2025.01.20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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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사람의 분노, 질책으로 포장한 책임 회피
잦은 VIP 격노, 편 가르기와 사회 갈등 증폭
참지 못한 대가는 본인과 국민 모두에 혹독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오후 경기 과천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조사를 마치고 차량으로 서울구치소로 이동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오후 경기 과천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조사를 마치고 차량으로 서울구치소로 이동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격노’라는 표현은 상하 관계를 내포한다. 소위 ‘윗사람’이 분을 참지 못한 사실을 ‘아랫사람’에게 알리는 격한 표현이다. 그래서 격노는 질책의 뜻도 일부 갖는다. ‘네가 혹은 너희들이 일을 이따위로 해서 내가 이만큼 화가 났다’는 점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서류나 컵을 집어 던지는 과격한 행동이나 고성 사이사이 추임새처럼 “내가 뭐랬어?”, “그래, 안 그래?” 등의 추궁도 이어지기에, 윗사람의 대노는 가르침으로 포장한 폭력이자 책임 회피다.

윗사람이 격노할 때 아랫사람은 잔뜩 주눅 든다. 머릿속이 암전돼 다그침에 답을 쉽게 찾지 못한다. 이성은 사라지고 회피 심리가 본능적으로 대체한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죄송하다”를 반복하며 머리를 연신 조아린다. 사실을 강조해 화를 더 돋우기보다 거짓말이라도 해 공포스러운 상황을 모면하는 데 급급해진다. 겨우 자리를 벗어난 뒤엔 안도감보다는 모멸감이, ‘잘하자’는 다짐보다 ‘왜 나한테?’라는 소위 ‘멘붕’, 억울함이 엄습한다. 기자 생활 20여 년 동안 이런 윗사람을 둔 정부부처, 기업, 공공기관, 협회 등을 여럿 경험해 나름 아랫사람 입장에서 내린 결론이다. 자괴감에 빠져 업을 떠나거나, 정신과 치료를 받은 취재원도 적잖았다. 굴지의 대기업 사주의 사모와 그 자녀, IT기업 대표의 폭언폭행에 수반된 격노는 사회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후 부드러운·온화한 리더십이 화두가 됐다.

격노가 개인, 기업을 넘어 국가 차원의 행위가 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우리는 2년 반 동안 최고 권력의 잦은 격노 소식에 노출됐다.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격노여서 굳이 감추지 않았다. 문제는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는, 정책 집행을 궤도에 올리는, 참사의 책임을 묻는, 약자를 보호하는 그런 긍정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격노한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VIP 격노’는 외려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갈등을 증폭시켰으며, 편 가르기를 공고히 다지는 쪽으로 작동했다. 더 나아가 ‘감히 나를(내 아내를)~’이라는 내심을 노골적으로 분노에 담았다는 점에서 전근대적이다.

자주 분노하는 윗사람과는 대화, 토론, 협상, 설득이 불가능하다. 본인 신념·생각과 다른 보고가 올라오면 화부터 내기 일쑤다. 아랫사람들은 제대로 된 보고를 올리기 주저하거나 호도하고, 직언보다 윗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선택하게 된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 박빙' 거짓 보고나, “국민 여러분, 다시 한번 들어주십시오”라던 ‘바이든~날리면 사태’, “조국 일가 수사를 지휘했으니 대통령은 교육전문가” 따위의 말들이 이 정부에서 스스럼없던 이유다.

내란 실패에 격노한 것일까. 여전히 그는 ‘부정선거’ 망상에 사로잡힌 채 “끝까지 싸우겠다”고 외치고 있다. 위헌적 포고령도 “부하가 잘못 베낀 것”으로 떠넘기는 수준 이하의 행태마저 서슴지 않는다. 권위는 챙기고 누리되, 책임과 반성은 멀리한 안하무인이었다. 그래도 내란 우두머리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국민 역시 극도의 분열과 혼란, 경제 부진, 낮아진 국격 등 비싼 청구서를 떠안게 됐다. 대통령 잘못 뽑은 대가다. 그럴 줄 몰랐다고? 손바닥 왕(王) 자에 반말, 구둣발 등 징조는 있었다. 교훈을 찾자면 다음 선거에선 성품까지도 검증대에 올려야 한다는 것일 테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이 열린 18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인근 도로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이 열린 18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인근 도로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이대혁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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