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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과 장만옥을 추억하다... 왕가위 영화 '동사서독' 촬영지

입력
2025.01.25 10:00
수정
2025.01.25 15:07

<156>황하 답사 ⑧양가령, 청량산, 홍석협, 쿠부치

중국 산시성(섬서성) 위린에 위치한 홍석협과 유계하. 1994년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 촬영지다. 장국영, 양조위, 임청하, 장만옥 등 당대의 홍콩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영화다. ⓒ최종명

중국 산시성(섬서성) 위린에 위치한 홍석협과 유계하. 1994년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 촬영지다. 장국영, 양조위, 임청하, 장만옥 등 당대의 홍콩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영화다. ⓒ최종명

1935년 10월 19일 장시성 루이진(瑞金) 소비에트를 떠난다. 367일 동안 국민당 군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주력부대 모두 혁명 근거지인 산시성(섬서성) 옌안(延安)에 안착한다. 중국공산당 홍군의 장정(長征)이다. 14개 성을 지나며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설산을 넘고 쑥대밭을 지난다. 수십 차례 전투가 벌어진다. 희생은 상상만으로도 비극이다. 옌안에서 13년을 머물렀다. 공산당 중앙의 주거지였던 양가령(楊家嶺)으로 간다.

중국공산당 대장정 종착지, 옌안 양가령

옌안 양가령 유적지 입구. ⓒ최종명

옌안 양가령 유적지 입구. ⓒ최종명

중국의 혁명유적지는 무료입장이다. 공산당 역사 현장을 찾는 관광객을 자주 만난다. ‘홍색여행(紅色旅遊)’이 많아서다. 혁명 열사의 삶과 죽음이 엄청나게 많다. 공산당 회의 장소도 문건만큼 많다. 박물관이나 기념관도 셀 수 없다. 전국 어디나 존재한다. 1938년 11월부터 1947년 3월까지 당 중앙지도자가 거주했다. 아침부터 단체 관람객으로 행렬이 길다. 평소와 달리 경건한 분위기라 낯설다.

양가령 유적지의 저우언라이 구거. ⓒ최종명

양가령 유적지의 저우언라이 구거. ⓒ최종명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류샤오치 구거(舊居) 위치가 표시돼 있다. 산시, 간쑤, 닝샤 일대에는 토굴이 많다. 야오둥(窯洞)이라 한다. 쉽게 팔 수 있으니 집 장만이 수월한 주거양식이다. 저우언라이 구거로 간다. 아치형 창과 문, 벽돌과 흙으로 담장과 지붕을 꾸몄다. 당시 모습은 아니고 지도자급으로 깔끔하게 단장했다. 1939년 5월부터 1944년 11월까지 살았다. 공작 업무로 자주 집을 비웠다.

양가령 유적지의 주더 구거. ⓒ최종명

양가령 유적지의 주더 구거. ⓒ최종명


양가령 유적지의 마오쩌동 구거. ⓒ최종명

양가령 유적지의 마오쩌동 구거. ⓒ최종명

홍군 아버지로 대우받는 주더 구거로 이동한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난창봉기의 주역이다. 1928년 4월 28일 정강산에 은둔하던 마오쩌둥과 조우한다. 주모회사(朱毛會師)라 부른다. 정치와 군대의 결합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1940년 5월 태행산 항일전선에서 돌아온 후부터 살았다. 1941년 3월 또 다른 근거지인 왕가평(王家坪)으로 옮겼다. 마오쩌둥 구거가 나란하다. 4km 떨어진 봉황산 자락에서 1938년 11월 양가령으로 이주했다. 1943년 10월 조원(棗園)으로 옮길 때까지 살았다. 옌안 시절 마오쩌둥의 거처는 모두 12곳, 개방하는 관광지는 4곳이다.

양가령 유적지의 류사오치 구거. ⓒ최종명

양가령 유적지의 류사오치 구거. ⓒ최종명

류사오치를 만나러 간다. 선비 같은 공산주의자라 애틋하다. 1939년 3월부터 1943년 10월까지 살았다. 졸저 ‘13억 인과의 대화’에서 6번이나 혼인한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썼다. 부모 권유로 혼례만 올린 첫 부인을 빼면 동지로 맺어진 부인은 허바오전(何葆珍)이다. 소련 유학 후 귀국했을 때 마오쩌둥과 처음 만났다. 학생운동으로 제적돼 마오쩌둥 부부 집에 기거하던 허바오전(何葆贞)과 연분이 생겼다. 둘 사이에 2남 1녀가 태어났다. 혁명의 와중이라 장남을 고향 집으로 보냈다. 차남과 장녀는 평범한 가정에 양육을 맡겼다.

류사오치 구거의 침실 ⓒ최종명

류사오치 구거의 침실 ⓒ최종명

류사오치 구거의 가족 사진. ⓒ최종명

류사오치 구거의 가족 사진. ⓒ최종명

침실과 거실을 둘러본다. 벽에 걸린 사진에 눈길이 간다. 1939년 기록이다. 장남 류윈빈과 장녀 류아이친이 보인다. 부인 허바오전은 상하이에서 지하 투쟁 중 체포됐다. 혹독한 고문에도 신분을 숨기고 당의 기밀을 수호했다. 1934년 가을 난징에서 사형당했다. 서른두 살 나이였다. 1958년 류사오치는 6번째 부인 왕광메이와 함께 희생 장소를 찾았다. 마음 깊이 쌓았던 아픔을 풀어냈다. 혁명 반려자에게 깊은 애도로 참배했다. 혁명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아름답게’ 이름을 남겨야 한다.

옌안 청량산을 오르며 바라본 연하. ⓒ최종명

옌안 청량산을 오르며 바라본 연하. ⓒ최종명


청량산 신화서점 유적지. ⓒ최종명

청량산 신화서점 유적지. ⓒ최종명

시내에 연하(延河)가 흐른다. 또 하나의 황하 지류다. 강변 옆 청량산(清涼山)으로 간다. 옌안 시절 중국공산당 기관지 탄생지다. 사찰이나 민가로 사용하던 동굴에 터를 잡았다. 승려와 주민은 이주했다. 산을 오르자 중공중앙당보위원회(中共中央黨報委員會) 발행과 표시가 보인다. 바로 옆에 신화서점(新華書店) 유적지가 있다. 현재 1만3,531개 지점을 운영하는 최대 서점 프랜차이즈지만 시작은 미미했다. 1937년 4월 24일 서점 운영을 시작하고 당보를 발행했다.

옌안 청량산 중앙인쇄창 유적지. ⓒ최종명

옌안 청량산 중앙인쇄창 유적지. ⓒ최종명

중앙인쇄창(中央印刷廠) 유적지가 보인다. 수당 시대 사찰인 만불동(萬佛洞)을 차지했다. 1937년부터 당보인 주간지 ‘해방(解放)’을 발간했다. 기관지인 ‘해방일보’는 1948년까지 2,130호를 인쇄했다. 노동자와 부녀, 청년을 위한 신문도 만들었다. 교양서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고전인 ‘삼국연의’ ‘손자병법’은 물론 외국 소설인 ‘고리키 선집’ ‘돈키호테’도 제작했다. 피 비린내 나는 전쟁터의 후방에서 종이를 무기로 싸웠다.

옌안 청량산 7층 유리탑. ⓒ최종명

옌안 청량산 7층 유리탑. ⓒ최종명

8각 7층 유리탑(琉璃塔)이 있다. 명나라 숭정제 시대 탑이라 추정한다. 평범한 장인의 솜씨로 알려진다. 전국 중점 문물로 6.3m 높이다. 3층과 4층을 빼고 층마다 부처와 역사(力士), 비천(飛天)을 두고 빈 공간은 자그마한 불상으로 채웠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다 많이 떨어져 나갔다. 3층에는 용이 솟구치는 모습을 새겼다. 4층에는 봉황, 기린, 사슴, 천마가 있다. 공산당 유적지에서 뜻밖에 마음에 드는 유물을 만났다.

청량산 중앙인쇄창 유적지의 '다시 찾은 옌안' 시비. ⓒ최종명

청량산 중앙인쇄창 유적지의 '다시 찾은 옌안' 시비. ⓒ최종명

‘다시 찾은 옌안(重遊延安)’ 시비가 있다. 1959년 3월 예젠잉이 쓴 시다. 중국인민해방군 창설자 중 한 명이다. 7언절구 3편 84자다. 추억을 회상하며 다시 방문한 감회다. 군인이 쓴 시는 시인을 따라오기 힘들다.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조직을 부르짖던 시절이었다. 걸출한 군사전략가가 쓴 선전 문구 같은 느낌이다. 당 중앙의 민가(民歌)로 작곡돼 불리기도 했다.


옌안 떠난 지 12년이네, 이제 그 옛날 모습은 아니지만
왕가평과 양가령 보니, 지나간 흔적 머릿속에 생생하네
옛날 야오둥 시절, 마치 토비가 모두 강탈한 듯 재만 남았는데
산베이(陝北) 건아들 탁월해, 어려운 일마다 재주를 발휘했네
마을 사람들 진심으로 찾아주고, 대추와 호박으로 환대하네
올해 인민공사 운동이 박차를 가하니, 모두 앞장서 약진하자

예젠잉 '重遊延安 '

만리장성 중간 지점, 홍석협

위린 홍석협과 황하지류 유계하. ⓒ최종명

위린 홍석협과 황하지류 유계하. ⓒ최종명

북쪽 3시간 거리의 위린(榆林)으로 간다. 홍석협(紅石峽)을 찾아간다. 황하 지류 유계하(榆溪河)가 흐르고 있다. 양쪽으로 약 350m에 이르는 협곡이다. 동쪽과 서쪽 절벽은 11.5m와 13m로 약간 차이가 난다. 역사에 처음 기록한 왕조는 서하다. 건국 황제 이원호의 할아버지 이계천이 풍수지리에 맞춰 동굴을 조성했다. 조상을 매장했다. 명나라 초기인 1472년 순무를 역임한 여자준이 장성을 쌓았다. 협곡은 장성 안으로 들어왔다.

위린 진북대 장성 입구. ⓒ최종명

위린 진북대 장성 입구. ⓒ최종명


위린 진북대 장성. ⓒ최종명

위린 진북대 장성. ⓒ최종명

2km 떨어진 지점에 진북대(鎮北臺)가 있다. ‘만리장성제일대’라 불린다. 명나라는 몇 차례에 걸쳐 동쪽 산하이관에서 서쪽 자위관까지 장성을 구축했다. 거의 중간 지점이다. 유목민족의 군사력에 대한 경계다. 군대가 주둔하고 행정기관까지 두는 관(關)과 달리 정방형 망루다. 4층 규모 30m 높이다. 베이징 인근에 위치한 사마대(司馬臺)는 동북 방면을 지킨다. 서북 방면은 진북대 몫이다.

홍석협 동쪽 절벽 웅산사 석각. ⓒ최종명

홍석협 동쪽 절벽 웅산사 석각. ⓒ최종명

홍석협 동쪽 절벽에 송나라 시대 건축한 웅산사(雄山寺) 유적이 있다. 10여 개의 석굴을 파고 부처를 봉공한 사찰이었다. 지금은 석각만 남았다. 상단에 위진구변(威震九邊)이 또렷하다. 명나라 시대 장성을 따라 구진(九鎮)을 설치했다. 만리에 이르는 장성의 위세를 뽐내는 문구다. 국민당 장군이 항일 의지를 썼다는 환아하산(還我河山)이 눈길을 끈다. 남송의 영웅 악비가 잃었던 영토를 되찾고 쓴 글이다. 웅대한 포부를 자랑하려고 인용했다. 석각이 100자가 훨씬 넘는다. 하나하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홍석협 동쪽 절벽 아래 '광택거' 도랑. ⓒ최종명

홍석협 동쪽 절벽 아래 '광택거' 도랑. ⓒ최종명

홍석협 동쪽 절벽의 동굴. ⓒ최종명

홍석협 동쪽 절벽의 동굴. ⓒ최종명

여자준이 장성을 쌓을 때다. 홍석협 상류에 도적떼들이 몰려 살던 호수가 있었다. 물이 깊어 접근하기 힘들자 암석을 부수고 도랑을 만들었다. 도랑으로 물이 다 빠지자 기습해 소탕했다. 도랑을 광택거(廣澤渠)라 불렀다. 절벽을 끼고 도랑이 흐른다. 동굴 안을 거쳐 밖으로 돌아나간다. 용수가 넉넉한 주거지였다. 불을 피운 흔적도 있다. 절벽 사이로 올라오는 통로가 좁다. 천혜의 요새다. 틈새로 들어온 햇살이 조명처럼 비추고 있다.

홍석협 동쪽 절벽 동굴 안 천장의 태극 문양과 동물 그림. ⓒ최종명

홍석협 동쪽 절벽 동굴 안 천장의 태극 문양과 동물 그림. ⓒ최종명


홍석협 동쪽 동굴 안에서 본 서쪽 절벽. ⓒ최종명

홍석협 동쪽 동굴 안에서 본 서쪽 절벽. ⓒ최종명

천장을 보니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음과 양, 팔괘가 선명하다. 원 밖으로 신비한 동물이 엉켜 있다. 벽에 그린 어설픈 꽃 그림이 듬성듬성 사라지고 있다. 돌을 다듬어 만든 반듯한 침실도 있다. 대문 밖으로 서쪽 절벽이 환하게 드러난다. 멀리 석각도 군데군데 보인다. 여러 사람이 함께 있기에 좁다. 옆 동굴과 쪽문이 있어 왕래가 가능하다. 도랑 따라 동굴도 이어졌다. 동굴에 앉아 있으니 왠지 낯설지 않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홍석협 동굴에서 촬영한 영화 '동사서독' 포스터.

홍석협 동굴에서 촬영한 영화 '동사서독' 포스터.

1994년 방영된 영화 동사서독(東邪西毒) 촬영지다. 김용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을 원작으로 왕자웨이가 감독했다. 당대 최고의 홍콩 배우가 총출동했다. 주옥 같은 대사에 환영과 실제가 난무하는 명작이다. 2013년 다시 상영된 '동사서독 리덕스'까지 보고 또 봤다. 주인공 장궈룽(장국영)이 기거하는 황무지 주막이 바로 여기다. 어두침침하고 암울한 공간에 어울린다. 자연 조명으로 주제를 잘 살리고 뛰어난 영상미를 획득했다. 영화를 떠올리니 계속 머무르고 싶다. 어둠 속 먼지가 햇살 따라 휘날리니 영화 감상은 이제 그만.

홍석협 서쪽 절벽에서 바라본 동쪽 절벽. ⓒ최종명

홍석협 서쪽 절벽에서 바라본 동쪽 절벽. ⓒ최종명

홍석협을 흐르는 유계하. ⓒ최종명

홍석협을 흐르는 유계하. ⓒ최종명

동굴을 나와 다리를 건넌다. 서쪽 절벽을 따라가면서 다시 영화를 떠올린다. 아픈 상처 가득한 연인 장만위(장만옥)가 술 대신 물을 마시는 장면이다. 동굴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를 담아내기에 참 제격이다 싶다. 드넓은 땅에서 딱 맞는 로케이션을 찾다니 인연이 깊다. 영화 완성도를 높였으니 대단한 스태프다. 별명인 웅석협(雄石硤) 석각이 선명하게 보인다. 동굴 문 옆에 쓴 광택거도 어렴풋하다. 강변으로 내려간다. 황하 지류의 물과 모래로 장난치는 아이들이 있다. 역사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재미있게 놀고 있다.

황사 진원지 쿠부치 사막

네이멍구자치구 바오터우 쿠부치 사막의 낙타. ⓒ최종명

네이멍구자치구 바오터우 쿠부치 사막의 낙타. ⓒ최종명

북쪽으로 이동하면 내몽골 오르도스(鄂爾多斯)다. 다시 황하를 건너면 바오터우(包頭)다. 두 도시 사이에 중국 7대 사막이 있다. 위린에서 약 250km 떨어진 쿠부치(庫布齊) 사막으로 간다. 사막 북쪽으로 황하가 흐른다. 내몽골 땅을 동진하다가 남진한다. 시안 부근에서 다시 동진해 발해까지 질주한다. 바오터우와 가까운 동쪽 끝자락에 사막 놀이터가 있다. 차량을 타고 안으로 들어가니 사막의 단골 낙타가 손님을 기다린다.

쿠부치 사막의 낙타 타기 체험. ⓒ최종명

쿠부치 사막의 낙타 타기 체험. ⓒ최종명

동서 400km에 이르고 남북으로 20~50km다. 한국으로 날아오는 황사 진원지로 알려져 있다. 낙타 타고 사막을 한 바퀴 돈다. 맨발로 사막 깊이 들어가 본다. 사막이 멈추는 지점에 황하 지류가 흐른다. 물길은 매우 얕다. 호시탐탐 모래를 노리고 있는데 위로 올라오긴 힘들다. 베이징과 가장 가까운 대형 사막이다. 사막을 녹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황하의 용왕이 용솟음치면 효과가 있으려나. 망상은 더위 때문일 듯하다.

황하 유역 지도. ⓒ최종명

황하 유역 지도. ⓒ최종명

황하는 칭하이를 시작으로 산둥까지 기나긴 유람을 한다. 장장 5,687m 황하는 흙과 모래 위에서 탄생한 문명이다. 황하가 범람하면 인간은 지혜를 동원했다. 문화가 싹트고 종교와 철학이 생겨났다. 유목과 농경의 싸움터였다. 멸망과 건국을 거듭한 왕조의 터전이었다. 전 구간은 아니지만 황하 중류를 답사하니 중국의 역사가 새롭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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