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원망 대신 평화"를 염원한 '히바쿠샤의 얼굴'

입력
2025.01.27 04:30
20면
구독

사사모리 시게코(笹森?子, 1936.6.15~2024.12.15)

1945년 일본 히로시마 원폭에 얼굴과 상반신, 두 손에 심한 화상을 입은 13세 소녀 사사모리 시게코는 55년 미국서 성형수술을 받고 새 삶을 얻었다. 그는 짙은 화장과 세월의 흔적으로도 온전히 가려지지 않는 '히로시마의 얼굴'로서 평생 핵무기의 잔인한 진실을 세상에 알리며 반핵 평화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이념과 정치,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 모두가 서로에게 친절한 세상을 염원했다. hibakushastories.org

1945년 일본 히로시마 원폭에 얼굴과 상반신, 두 손에 심한 화상을 입은 13세 소녀 사사모리 시게코는 55년 미국서 성형수술을 받고 새 삶을 얻었다. 그는 짙은 화장과 세월의 흔적으로도 온전히 가려지지 않는 '히로시마의 얼굴'로서 평생 핵무기의 잔인한 진실을 세상에 알리며 반핵 평화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이념과 정치,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 모두가 서로에게 친절한 세상을 염원했다. hibakushastories.org

1945년 8월 6일 월요일 아침, 일본 히로시마의 13세 소녀 사사모리 시게코(Sasamori Shigeko, 당시 성은 Niimoto)는 도심 교바시강을 가로지르는 나카구 쓰루미다리 서쪽 끄트머리에 있었다. 히로시마여자상업학교 1학년이 맡은 청소 구역이 거기였다. 징집을 면한 고령의 남자들이 공습 대피 경로에 장애가 될 만한 건축물들을 철거하면 그 잔해를 치우는 일. 미군 폭격기의 ‘불폭탄(소이탄)’ 소문은 무성했지만 당시 히로시마는 폭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공습 경보도 없이 평온하던 오전 8시 15분, 사사모리는 청명한 하늘을 날던 미군기가 하얗게 반짝이는 뭔가를 떨어뜨리는 걸 보며 곁에 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참 아름답다.” 그러곤 의식을 잃었다.

“얼마 뒤 깨어났지만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캄캄했어요. 그러다 짙은 안개가 걷히듯 어슴푸레 주변이 보였어요. 완전히 달라진 풍경. (…) 화상으로 벌겋게 피부가 벗겨진 몸으로 강에 뛰어드는 사람들. (…)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그때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화상을 입은 엄마가 그 와중에도 열기에 그을린 아이에게 젖을 물려 달래려 하고 있었어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어요. ‘이게 말로만 듣던 불폭탄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냥 불폭탄이요.

그는 불폭탄이 또 떨어질 거라는 사람들 말에 놀라 그들을 따라 약 1㎞를 걸어 미나미구의 대피소로 피신했다. “아프진 않았어요. 아무 감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그는 얼굴과 상반신, 두 팔과 두 손까지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대피소에 도착한 그는 열기에 엉겨 제대로 열리지도 않는 눈과 입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하염없이 자기 이름과 집 주소를 외치며 부모님을 찾았다. 어머니는 피폭 닷새째에야 딸을 찾아냈고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55년 시사주간지 ‘Time’은 “머리카락도 눈썹도 턱도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얼굴 아래쪽 절반이 녹아내려 목구멍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고 당시 그의 용모를 묘사했다.

어머니는 딸의 살갗에 엉겨 붙은 천 조각들을 떼어낸 뒤 식용유를 바르고 고름을 닦아내며 간병했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미국서 성형 수술을 받고 ‘얼굴(의 일부)’을 되찾았다. ‘히로시마 처녀들(Hiroshima’s Maidens)’이라 불린 25명의 여성 중 한 명인 그는 남은 생을 ‘히바쿠샤(被爆者)의 얼굴’로서, 일부의 냉소까지 견디며 유엔과 미 의회에서 증언하고 여러 행사에서 강연하며 언론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원폭의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피폭 80주년을 약 반년 앞둔 지난해 말,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줄여서 피단협)’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 그가 별세했다. 향년 92세.

피폭 1년 전인 1944년의 사사모리 시게코. 1년 뒤 그는 미군기가 떨군 '불폭탄'이 햇살에 반짝이며 낙하하는 모습을 보며 참 아름답다고 감탄하게 된다. 위키피디아

피폭 1년 전인 1944년의 사사모리 시게코. 1년 뒤 그는 미군기가 떨군 '불폭탄'이 햇살에 반짝이며 낙하하는 모습을 보며 참 아름답다고 감탄하게 된다. 위키피디아

전후 미국의 일본 원폭피해조사단(ABCC)은 1차 피해(충격파와 열복사선)로 히로시마에서만 약 12만 명이 숨졌고, 외상 후유증과 방사능 피폭(2차 피해)까지 합치면 5년간 약 20만 명이 숨졌다고 집계했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30만 명)의 2/3였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사사모리는 기적적인 행운의 주인공이었다. ABCC가 분석한 바 폭발 반경 0.5마일(0.8km)이내의 10명 중 9명이 사실상 즉사했고 1마일 이내 생존자는 대부분 건물 안에 있던 이들이었다. 사사모리가 있던 곳은 그라운드 제로에서 약 1㎞ 떨어진 실외였다.

하지만 삶을 잃었다. 얼굴이 망가지고 남은 피부도 검붉은 화상 흉터(켈로이드)로 얽은 ‘아카오니(Aka Oni, 붉은 악마)들’. 사사모리처럼 어리고 젊은 여성들은 수치심과 절망감에 스스로를 가두고 주로 밤에만 잠시 집 밖을 나서보곤 했다. 그런 어느 밤, 사사모리는 찬송가 소리에 이끌려 그곳으로 갔다. 원폭 참상을 세상에 알린 선구자 중 한 명인 다니모토 기요시(谷本 清, 1909~1986) 목사의 히로시마 연합감리교회였다.

다니모토는 신학(関西学院大)을 전공한 뒤 장학생으로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모리대 캔들러신학교를 졸업하고 전시인 43년 귀국했다. 피폭 당일 교회 마당에서 일을 하던 그는 섬광을 본 순간 커다란 바위 뒤로 피신한 덕에 중상을 면했고, 그날부터 현장에서 생존자들을 도왔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미국인 저널리스트 존 허시(John Jersey)가 쓴 “2차대전의 핵 홀로코스트”에 대한 최초의 논픽션인 ‘히로시마(1946)’의 주요 증언자였고, 책 출간 이후 미국에 초대돼 31개 주 주요 도시를 돌며 원폭의 참상을 알렸다.

문예비평 주간지 ‘Saturday Review’ 편집장이던 저널리스트 노먼 커즌스(Norman Cousins, 1915~1990)와도 그러면서 친분을 쌓았다. 커즌스는 ‘히로시마평화센터협회(Hiroshima Peace Center Associates(HPCA)’란 단체를 설립, 49년부터 ‘도덕적 입양(Moral Adoption)’, 즉 원폭 고아원을 짓고 직업교육 등을 통해 아이들의 자활을 돕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평화활동가이기도 했다. 다니모토는 그에게 ‘히로시마 처녀들’의 처지를 알리며 도움을 청했고, 커즌스는 53년 히로시마를 방문해 다니모토의 교회에서 약 35명의 10대 피폭 소녀들을 만났다.

피폭 직후의 폐허 속에 담벼락만 겨우 남은 히로시마 나가레가와 연합감리교회. 시게코는 저 교회에서 은인인 기요시 다니모토 목사와 자신처럼 얼굴을 잃은 또래 소녀들을 만났다. worldwar2database.com

피폭 직후의 폐허 속에 담벼락만 겨우 남은 히로시마 나가레가와 연합감리교회. 시게코는 저 교회에서 은인인 기요시 다니모토 목사와 자신처럼 얼굴을 잃은 또래 소녀들을 만났다. worldwar2database.com

커즌스는 HPCA 실무진과 함께 성형 수술비용과 항공-체류비용 모금에 나섰지만 초기엔 아무 성과가 없었다. 냉전 기운이 달아오르던 때였고, 일본 반핵 평화운동을 반미 성향의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 계열이 주도하던 때였다. 전범국 일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복수심과 적개심이 여전히 시퍼렇던 때이기도 했다. 일부 자선 재단은 이념적 시비를 우려했고, 어떤 재단은 일부 피해자만 대상으로 한 활동의 편파성을 경계했다. 수술 도중 숨지거나 하는 등의 불상사와 책임을 우려한 곳도 있었고, 재단 규정에 그 사안을 후원할 근거가 없다고 답한 곳도 있었다.

돌파구는 뉴욕 마운트시나이병원의 저명 성형외과의 아서 바스키(Atrhur J. Barsky) 등 3명의 의사가 선뜻 동참하면서 열리기 시작했다. 병원 측도 1인당 최소 3, 4차례 수술비와 4~5개월 입원비를 무료로 해주겠다고 나섰고, 뉴욕 퀘이커 기독교인들이 수술 전후 체류 기간 동안 대상자들을 각자의 집에서 돌보겠다며 자원했다. 커즌스의 지인이던 도쿄 영자신문 ‘니폰타임스(Nippon Times)’ 발행인 도가사키 기요시는 당시 미 극동사령부(FECOM) 사령관이던 존 E. 헐(John E. Hull)을 설득해 공군 수송기를 확보했다. 수술 후 귀국편은 팬암사가 제공했다.

바스키 등 의료진은 약 한 달간 휴가를 얻어 자비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결핵 등 다른 질병은 없는지, 성형-안면 복원 기술로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등을 판단해 희망자 43명 가운데 20명을 선발하기 위한 출장이었다.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소녀들이 겪게 될 또 한 번의 절망, 소녀들 간의 과열 경쟁 등을 염려하며 심리적으로 무척 위축됐다고 한다. 프로젝트 자체를 경계한 이들도 많았다. 이데올로기 선전용으로 활용하려는 것이냐, 배후에 미국 정부가 있는 것은 아니냐···. 소녀들을 서커스 볼거리로 활용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남겨진 이들 때문에 선택받은 이들이
힘들어하지 않기를.”

'히로시마 처녀들'의 기도, Norman Cousins의 1967년 책
'Present Tense: An American Editor’s Odyssey'에서.

훗날 커즌스는 “오히려 소녀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격려했다”고 회고했다. 소녀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미국 의료진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들 10대 소녀들의 거리낌없는 발랄함에 이내 전염됐다”고, 67년 책 'Present Tense: An American Editor’s Odyssey'에 썼다.
최종 선발 전날 저녁 특별 기도회에서 소녀들은 두 가지를 기도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를 데려가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미국 의사들이 힘들어하지 않기를.” 그리고 “남겨진 이들 때문에 선택받은 이들이 힘들어하지 않기를.” 의료진은 5명을 늘려 25명을 선발했다. 그중 한 명이 사사모리였다.

'히로시마 처녀들'은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으며 55년 5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각각 수차례씩 총 138회 안면 복원 및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고, 수술 도중 숨진 1명을 제외한 24명은 새 얼굴을 얻어 일본으로 귀국했다. 다수는 결혼했고, 사회복지사로, 디자이너로, 전화교환원과 비서 등으로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 그들과 동행했던 일본인 의사 3명은 미국의 선진 성형기법을 익혀 남은 이들을 도왔다.
체류 기간을 커즌스의 코네티컷 집에서 그의 세 딸과 함께 보낸 사사모리의 꿈은 간호사가 되는 거였다. 그는 커즌스의 제안으로 59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수양딸처럼 지내며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시더스 시나이 메디컬 센터’에서 교육받고 간호조무사가 됐다. 그는 주로 신생아실과 파킨슨 병동에서 근무했다.

1980년 6월, 핵전쟁에 대비한 미 상원 의료보건소위원회 청문회에서 사사모리는 “다시는 핵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 사명이 내게 있다. 핵무기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당시 아이였던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려야 하는 사명이다. 이제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세상에 나왔지만 나는 그들의 미래도 염려한다.” ‘힘을 통한 평화’를 기치로 이듬해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전략방위구상’을 앞세운 핵전력 증강 정책을 고수했다.

미국은 45년 가을 ABCC의 공식 성명 즉 “원폭 방사능에 기인한 사망자는 더 이상 없고, 잔존 방사능에 의한 생리적 영향도 보이지 않는다”(오에 겐자부로 '히로시마 노트')는 입장을 전후 약 10년간 고수했다. 그사이 수많은 이들이 백혈병과 각종 암, 원인 모를 질병으로 숨져갔다. 노벨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1965년 출간한 저 책에, 현지 매체인 ‘주코쿠(中国)신문사’ 조판부에 ‘방사능’이란 낱말을 조판할 활자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 10년의 강요된 침묵은 1954년 3월 마셜군도 비키니섬의 미 핵실험 당시 인근 해역에서 조업하던 일본 참치어선 선원 23명이 피폭돼 1명이 숨진 뒤에야 깨졌다. 일본 시민들은 비로소 원수폭 금지 서명운동에 나섰고, 그 여세로 피폭자들의 본격적인 증언과 의료-시민단체 등의 실태조사가 이뤄졌다. 55년 ‘제1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열렸고, 이듬해인 56년에야 피단협이 출범했다.

미국과 소련의 핵 실험 및 보유를 두고 피단협 내 공산당과 사회당 계열이 이념적으로 대립하다 끝내 분열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히로시마 처녀들’을 두고도 비판-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핵 가해자인 미국을 관대한 치유자-구원자처럼 치장하는 도구로 이용됐다는 주장, (잠재적 군인인) 남성은 일절 배제하고 오직 젊은 미혼 여성들만 선택함으로써 여성성을 대상화했다는 비판 등등. 미국인들, 특히 태평양전쟁에서 아들과 남편을 잃은 이들 중에는 피폭의 비극조차 전범국 국민이 마땅히 감수해야 할 ‘정의’이자 교훈의 매질이라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사사모리는 자신(들)을 흘겨보는 그들의 시선도 견뎌야 했다. 그가 스스로를 ‘세계 시민’이라 정체화한 까닭에는, 전후 냉전 국면에서 정치적 위세를 되찾은 일본 극우 세력의 무도한 호전성과 그걸 빌미로 반일 민족 감정을 부추기는 주변국 선동가들의 적대적 공생에 대한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1980년 원폭의 참상을 증언하기 위해 미 상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사모리 시게코(위 사진 맨 왼쪽, AP 연합뉴스). 히로시마 평화공원 뜰에 건립된 노먼 커즌스 기념비(아래 왼쪽 사진). 46년부터 원폭의 참상을 세상에 알린 다니모토 기요시 목사(위키피디아).

1980년 원폭의 참상을 증언하기 위해 미 상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사모리 시게코(위 사진 맨 왼쪽, AP 연합뉴스). 히로시마 평화공원 뜰에 건립된 노먼 커즌스 기념비(아래 왼쪽 사진). 46년부터 원폭의 참상을 세상에 알린 다니모토 기요시 목사(위키피디아).

스웨덴 작가 스티그 다게르만(Stig Dagerman)은 46년 전후 독일인들이 겪던 추위와 굶주림의 비참을 취재해 기록한 책 ‘독일의 가을’에서, “독일의 고통은 집단적이지만 독일의 잔학행위는 집단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면적인 고통을 정의로 간주하는 것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히로시마 사람들은 죽음에 임할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한 의사의 편지를 책에 인용했다. “원수폭 반대 따위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당하는 참고자료로 자신의 비참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감정, 피폭자는 모두 구걸이나 하는 비렁뱅이로 간주되고 싶지 않다는 감정” 때문이었다. 물론 당당히 나선 수많은 ‘히바쿠샤’들도 있었다.
사사모리는 과거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경계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적 가치와 존엄을 지키고자 했다. “처음엔 내게도 ‘왜 내가…’ 하는 원망의 마음이 있었지만, 살면서 내 정체성은 달라졌다. 이제 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것에만 몰두할 뿐”이라고 말했다. 사사모리가 청소년 강연 때마다 ‘분노의 춤’이란 걸 가르쳤던 것도 그래서였다. 이런저런 일로 분노가 치밀 때면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거나 발을 구르며 스스로 해소하되, 결코 상대에게 그 화를 풀려고 하지 말라는 거였다.

사사모리의 결혼 여부 등 ‘히로시마 처녀’로서의 삶 이외의 사생활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그는 예술과 과학을 통한 청소년 평화운동 단체인 유엔 산하 ‘Youth Arts New York’에서 ‘히바쿠샤 스토리’ 프로젝트를 무대 삼아 주로 활동했고 2003년 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회복된 뒤부턴 말년까지 피단협 활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사사모리는 62년 낳은 아이(Norman Cousins Sasamori)에게 영적인 아버지인 커즌스의 이름을 선물하며 “너를 결코 전쟁에 휩쓸리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너는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스스로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최윤필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