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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노래하소서"… 인류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스'가 광화문 집회에 등장했다

입력
2025.02.15 06:0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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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출판 담당 기자의 책상에는 100권이 넘는 신간이 쌓입니다. 표지와 목차, 그리고 본문을 한 장씩 넘기면서 글을 쓴 사람과, 책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이를 읽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출판 기자가 활자로 연결된 책과 출판의 세계를 격주로 살펴봅니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광화문에서 나부끼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첫 문장이 적힌 노란 깃발에 사로잡혔다. 사진은 그가 직접 찍은 깃발 사진. 안재원 교수 페이스북 캡처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광화문에서 나부끼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첫 문장이 적힌 노란 깃발에 사로잡혔다. 사진은 그가 직접 찍은 깃발 사진. 안재원 교수 페이스북 캡처

"분노를 노래하소서, 민중이여!"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광화문에서는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진 깃발이 나부꼈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이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첫 문장인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에서 따온 문구인데요. 엑스(X·옛 트위터)에서 '하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리아스 덕후' 20대 여성이 만든 깃발로 유명해졌지요. 여의도와 남태령, 한남동에서도 우뚝 서 있던 바로 그 깃발입니다.

깃발은 마치 운명처럼 집회 구경을 갔던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의 눈에 띄고 맙니다. 안 교수는 "깃발 주인이 누구이고, 무슨 생각으로 그 깃발을 들게 됐는지 궁금해 (깃발 주인과) 몇 마디 주고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일리아스 덕후가 서울대 서양고전학연구소장에게 명함 받은 썰'로 X에서 널리 회자됐습니다.

덩달아 '일리아스'도 관심을 샀는데요. 안 교수는 "서양문학의 처음에 문헌상 등장하는 말이 '분노'라는 점이 중요하다"며 "그 분노는 정의로 연결되며, 그 정의가 각자의 몫으로, 그 몫이 각자의 권리로 이어진다"고 짚었습니다. 아킬레우스 이름도 '백성의 고통'을 뜻하죠. 무엇보다 아킬레우스를 영웅으로 만든 힘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 죽음의 공포와도 맞서 싸웠다는 점입니다. 한파와 대설에도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긴밤 지새운 '키세스 군단'에서 안 교수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이참에 저는 1만5,693행, 24권에 이르는 '일리아스' 읽기에 도전하고 있는데요. 고 천병희 교수가 1982년 옮긴 첫 원전 번역본과 2023년 나온 이준석 교수의 새 번역본이 있습니다. 천병희본은 우리말 표현을 살린 가독성이 돋보이고, 이준석본은 원문 표현을 충실히 옮긴 게 장점입니다. 문자가 없던 구술 시대의 노래이기에 술술 읽어나가기 힘에 부칠 수 있는데요. 매들린 밀러의 '아킬레우스의 노래'부터 읽고 '일리아스'로 넘어가기를 추천합니다.

일리아스·호메로스 지음·이준석 옮김·아카넷 발행·844쪽·3만5,000원

일리아스·호메로스 지음·이준석 옮김·아카넷 발행·844쪽·3만5,000원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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