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우리가 '괴물'을 키웠다

입력
2025.02.24 18:00
26면
구독


적대적 정치에서 등장한 계엄·파시즘
혐오에 호응한 유권자가 함께 키워
제도 불신 팽배하면 극단주의 득세할 뿐


21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교문 안에서 '윤석열 퇴진 긴급 고려대 행동을 준비하는 모임' 주최로 탄핵 찬성 집회(왼쪽)가, 교문 밖에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고대인들' 주최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21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교문 안에서 '윤석열 퇴진 긴급 고려대 행동을 준비하는 모임' 주최로 탄핵 찬성 집회(왼쪽)가, 교문 밖에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고대인들' 주최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난데없는 계엄 선포로 공포와 좌절을 야기한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있다. 대선이 이어질 것이고 새 정권이 들어설 것이다. 이것으로 민주주의는 회복될 것인가. 다음 과제는 훨씬 어렵다. 계엄은 탄핵으로 마무리될 것이 아니라 쌓였던 문제를 토해낸 지옥문일 것이다. 흉측한 모습을 드러낸 우리의 내면을 직면해야 한다.

무엇보다, 법관들이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할 것을 믿지 않는 국민이 이제 너무 많다. 법원이 발부한 영장을 ‘불법’이라 부르고 판사를 잡겠다고 법원을 침탈하고 헌법재판소장 집까지 찾아가 위협한다. 국회의원, 정부, 언론, 선관위에 더해 사법부까지 모든 민주주의 기구가 불신과 공격의 대상이 됐다. 또한 국회에 총 겨눈 것을 보고도 탄핵을 반대하고 부정선거를 믿는 국민이 40%나 된다. 그들은 “더불어민주당의 줄탄핵과 입법 폭주 때문에 탄핵 반대 집회에 나왔다”고 말하며 자신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윤 대통령과 여당이 대선을 염두에 두고 벌인 여론전이 꽤 성공한 셈인데, 그러느라 ‘의견이 다르면 무력으로 쓸어버려도 된다’는 극우적 발상을 들여놓고 말았다. 경쟁자를 잡겠다고 괴물에게 문을 열어줘 다 함께 죽을 위험을 자초했다.

한 번만 더 말하자. 군경으로 입법부를 통제하고 정적과 판사와 언론인을 ‘수거’하겠다는 발상은 자유민주주의도, 보수도 아니다. 이것은 파시즘이다. 민주당의 13건 탄핵소추가 과하다 한들 헌재가 결정(4건 기각, 9건 계류 중)할 일이지 위헌적 계엄을 선포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이 나라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보면 돌출 행동이 싹틀 토양이 있었다. 적대와 혐오와 폭력이라는 파시즘의 토양을 우리가 일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보복성 수사·감사는 점점 거칠어졌고 진영 간 적대감은 깊어졌다. 그 끝에 윤 정부의 검찰 정치가 있었고 되갚음당할 것이라는 공포가 ‘이재명은 안 된다’는 외침으로 메아리친다. 사법부 불신을 부추긴 것 또한 국민의힘만이 아니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 대표 유죄 판결을 “사법살인” “미친 판결”이라 했다. 판결이든 수사든 언론 보도든, 저마다 불리한 것은 믿지 않고 비난하며 제도를 흔들었다.

증오의 정치는 유권자의 분노를 먹고 자랐다. 지지자들은 상대 진영 정치인은 물론 당내의 다른 목소리마저 ‘수박’으로 찍어 절멸시키려 하지 않았던가. ‘깨어 있는 행동’이라 여겼던 문자폭탄과 판사 겁박은 본질적으로 다를까. 저쪽의 부정선거론을 비웃으면서 우리 편의 부정선거론은 성찰한 적이 있던가.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난민 등 약자의 권리 요구를 비문명, 언더도그마라고 비난하는 건 얼마나 거침없었으며 연예인들의 흠결에 쏟아낸 조롱은 얼마나 폭력적이었던가. 적대적 정치인과 혐오하는 시민은 서로를 잉태하고 키웠다.

12·3 계엄은, 야당과 부정선거를 탓하면 국회 무력화가 용인될 것을 알았던 권력자의 계산된 도박이었을 것이다. 기성 제도와 엘리트집단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팽배할 때 등장하는 게 포퓰리즘이다. 소수자 혐오를 전술 삼은 포퓰리즘은 지난 대선 때 이미 도래했다. 이에 선을 긋지 못했던 우리 사회는 극단적 포퓰리즘인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대통령과 헌법을 바꾸는 것만으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를 넘을 수 없다. 우리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하고는 놓쳤던 것, 즉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법, 다른 집단을 공동체 일원으로 환대하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관용과 절제의 정치 문화를 뿌리내리게 하고, 포용의 태도를 내면화해야 한다. 내란 책임자에게 온정을 베풀자는 말이 아니다. 극단주의자에겐 단호하되 국민의 절반과 통째로 결별할 수는 없다. 나와 다른 다양성을 수용하고, 정파성과 무관하게 사실을 인정하며, 무력 아닌 타협이라는 정치적 해법을 존중해야 한다. 국회, 사법부, 정부, 언론 등 제도가 굴러가게 해야 한다. 그래야 겨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우리 스스로를 구하는 길이다.

김희원 뉴스스탠다드실장
대체텍스트
김희원뉴스스탠다드실장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