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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무엇에 오래 머물지 못해도 한 시절의 흔적은 남아있다

입력
2025.02.28 13:00
11면

김혼비 '아무튼, 술'

편집자주

치열한 경쟁을 버텨내는 청년들에게 문학도 하나의 쉼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 중 빛나는 하나를 골라내기란 어렵지요. 소설집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으로 제55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송지현 작가가 청년들의 '자연스러운 독서 자세 추구'를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한국일보>를 통해 책을 추천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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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소의 아무튼 시리즈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관심사에 대해 점검하게 된다. 형편이나 상태 따위가 어떻게 되든 간에, 그러니까 '아무튼'이라는 부사 뒤에 자신 있게 넣을 수 있을 만큼 관심 가진 것들이 내겐 좀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그나마 꾸준히 즐기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술. 자칭 타칭 술도 술자리도 사랑하는 나였기에 언젠가 한 번쯤은 술에 대한 에세이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김혼비 작가가 이미 술에 대해 썼어.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웃기게"라고 전해 주었을 때, 어디 한번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지, 얼마나 웃긴지 두고 보자,라는 마음이 든 건 당연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느낀 낭패감과 질투심 또한. 김혼비 작가에 비하면 내가 마신 술은 그냥 수분 섭취 수준이었고, 술로 풀어낸 인생사 또한 내 인생을 견주기엔 술자리 안주조차 되지 못했다.

'아무튼, 술'에는 소주, 맥주, 막걸리, 와인을 넘어서 전통주에 칡주까지 다양한 주종이 등장한다. 그러나 주종만 다양한 것이 아니다. 혼술, 집술, 강술, 걷술 등의 상상도 못해보았던 다양한 음주 방법이 등장한다. 그리고 술을 매개로 한 다양한 사유. 사유들은 찬장에 두고 잊었으나 먹기 좋게 숙성된 술처럼 우릴 기다리고 있다.

앞서 말했듯 나는 한 가지 관심사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아니다. 기타를 배우겠다고 사방에 떠벌리다가도 F코드와 대면하는 순간 가차 없이 포기해 버린다. 수영을 시작하며 사둔 몇십 벌의 예쁜 수영복을 두고 접영을 마주하고는 수영장에 나가지 않는다. 만화를 그리겠다며 전공으로 선택까지 해놓고는 노력이 귀찮다며 전공을 바꿔버린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가도 '이미 누군가가 훨씬 잘 썼는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아무튼, 술·김혼비 지음·제철소 발행·172쪽·1만2,000원

아무튼, 술·김혼비 지음·제철소 발행·172쪽·1만2,000원

그런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몇 시간 후 시원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신나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순간 다음 날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가능성이 열리듯이, 문을 닫으면 저편 어딘가의 다른 문이 항상 열린다.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그러니까 이 문장에 따라 '아무튼, 술'을 덮고 나는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어떤 대상이든 '아무튼'이라고 부를 만큼 한 가지에 깊이 빠지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다시 말해 한때의 시간만큼은 충실히 지냈다는 뜻이지 않을까? 기타를 배우며 매일같이 연습하던 크로매틱도, 수영을 배우며 매일같이 사 모으던 수영복도, 그래도 전공으로 선택한 만화를 위해 매일같이 하던 크로키도, 이제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그것에 흠뻑 빠져있던 시절만큼은 진심이었기에 나의 아무튼은 '시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무엇에도 오래 머물지 못하지만 한 시절을 지나온 흔적은 깊이 남아있다. 찬장에 두고 잊은, 그러나 알맞게 익은 술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언젠가 나는 '아무튼, 시절'을 써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아무튼, 또 다른 시절을 지나면서.

송지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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