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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만만한가

입력
2025.03.1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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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개그맨 이수지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엄마라는 이름으로'. 유튜브 영상 캡처

개그맨 이수지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엄마라는 이름으로'. 유튜브 영상 캡처

개그맨 이수지의 유튜브 콘텐츠 ‘엄마라는 이름으로’가 화제다. 서울 강남 대치동에서 아이를 키우는 가상의 엄마를 묘사한 이 영상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사교육 현실을 꼬집은 풍자라는 의견도, ‘대치맘’ 조롱이라는 비판도 있다. 창작자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여론의 방향은 선명하다. 댓글창엔 “단정한 목소리와 은근한 반존대, 영어발음까지 똑같다”며 ‘내가 만난 극성 엄마’ 증언이 넘쳐났고, 대치맘들이 영상에 나온 고가의 점퍼를 중고거래 플랫폼에 내놨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평소 중고 거래량이 많았던 제품인지, 겨울 끝자락에 나오는 시즌성 매물인지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허영심에 비싼 점퍼를 샀던 엄마들이 남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점퍼를 처분했다’는 통쾌한 서사가 이미 완성됐기 때문이다. ‘대치맘’의 자리에 다른 사회적 약자를 앉혔어도 사람들은 웃었을까. 엄마들은 약자에도 속하지 못한 채 조롱당한다.

이수지가 연기한 ‘대치맘’에는 우리 사회의 병폐가 압축돼 있다. 고가의 차와 옷, 가방에는 욕하면서도 선망하는 물신주의가, 문장마다 빠지지 않는 영어엔 사대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배변 훈련 과외는 남들보다 조금만 늦어도 비정상으로 치부하는 획일주의와 무관치 않다. 이 그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엄마 역시 시대의 한계와 사회의 그늘에 갇혀 사는 개인일 뿐이다. 하지만 엄마는 이 모든 병폐를 만들어낸 주동자 취급을 당한다. 촌지를 요구하고 학생들을 차별하는 교사들의 존재는 은폐된 채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교육 붕괴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과거부터, 화살은 늘 엄마를 향했다.

희화화된 ‘대치맘’의 말투와 태도는 정작 중요한 맥락을 삭제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가장 높은 남녀 임금격차 등 남성 중심 노동시장에서 육아는 여성 몫이 된다. 돌봄과 가사는 노동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여성들은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했을 때 비로소 훌륭한 어머니로 칭송받는다. 또 이 모든 노동을 묵묵히 해내길 강요받는다. 배우 한가인씨는 지난해 차로 자녀들을 학교·학원에 데려다주는 ‘라이딩’ 영상을 올렸다가 “유난 떤다”는 악성 댓글에 시달렸다. 모든 일상이 콘텐츠가 되는 시대에도 돌봄 노동의 힘듦을 토로하는 영상은 거슬리는 콘텐츠가 된다.

지금의 3040 엄마들 대부분은 자신의 커리어를 전부 또는 일부 포기했다. 임금·가사·돌봄 노동 중 적어도 2가지 이상을 떠맡아 이중 노동을 한다. 끝도 없는 육아의 길 위에서 하루하루 분투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알뜰하지 않다고, 겸손하지 않다고, 묵묵히 희생하지 않는다고 꼬투리 잡지 말라.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 애쓰면서 살고 있다.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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