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마이크는 누가 쥐었나

입력
2025.03.06 04:30
26면
구독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대통령 탄핵심판 최종(11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최종의견을 진술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대통령 탄핵심판 최종(11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최종의견을 진술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윤석열 대통령은 다변가(多辯家)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참모나 주변인들과 30~40분을 훌쩍 넘겨가며 일일이 통화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특히 심야에도 텔레그램 문자 메시지를 읽고 참모들에게 하나하나 답변을 줬는데, 윤 대통령이 보낸 이모티콘으로 심기를 파악해야 하는 참모들이 이모티콘의 참뜻을 몰라 기자들에게 물어보는 일이 더러 있었다.

'1대1 소통'은 단점이 있다. 자신이 선호하는 특정 인물과 대화하면서 편향된 정보만 습득할 위험이 크고,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은 도외시할 가능성이 높다. 공식적인 기록이 남지 않는 경우가 많아 책임도 회피하기 쉽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정에 직접 나선 윤 대통령이 계엄 실행자들을 앞에 두고 "나는 그렇게 지시한 적이 없다" "상대가 잘못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배경이라고 짐작한다.

'말'을 좋아하는 윤 대통령은 보고를 압축적으로 받았다고 한다. "검사로 일하면서 각종 조서를 작성한 경험이 많고 사건(사안)의 줄기를 파악하는 데 능통한 데다가 효율적으로 일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라고 한 참모가 이유를 설명해 줬다.

윤 대통령은 A4 두세 장짜리 요약 보고서를 선호했다고 전해진다. 근거와 세부 내용을 제시한 후 결론을 도출하는 미괄식보다는, 핵심 내용부터 먼저 제시하는 두괄식 보고를 주문했다. 평생 공직생활을 한 참모는 "소수의견이나 부작용부터 일일이 담아 보고하면 윤 대통령께서 '야마(핵심 줄거리·기자들의 은어)를 살려라' '프레임을 생각하라'고 호되게 야단친 일이 여러 차례"라고 했다. '거대 야당의 폭거 때문에 비상계엄 선포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프레임으로 극우 지지층을 광장에 결집시킨 노하우가 윤 대통령에게 있었던 셈이다.

무책임한 말이 거대한 마이크(권력)와 만나면 대중을 현혹하거나 선동하는 흉기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언어는 장전된 권총과도 같다(Words are loaded pistols)"고 했다.

권력자의 말은 너무 쉽게 증폭된다. '약자 코스프레'에 나선 대통령이 구구절절 말하면 별다른 사실 확인 과정이 없어도 진실로 둔갑하기 일쑤다. 비상식적인 부정선거론처럼. 이런 걸 보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활동가들이 지하철을 가로막고 이동권 보장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수년째 무차별적 비난을 받는 것은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헌법재판관들이 탄핵 심판의 결론을 내고 나면 여러 말들이 오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여느 권력자의 일방적 독백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건강한 공론장의 회복이다. 말할 기회부터 공정하게 나누는 게 자유민주주의 정신 아닐까.

김지현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