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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타노스와 윤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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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7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에서 비상계엄 선포에 대한 입장을 담은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요즘은 좀 시들하지만 핫하기 이를 데 없었던 마블 세계관의 대표 빌런인 ‘타노스’는 다른 악당과는 사뭇 달랐다. 세계 정복이나 보물 등 사리사욕 추구 같은 것은 타노스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원 고갈과 인구 폭발 문제로 멸망한 자신의 고향 문명을 생각하면서 전 우주의 인구 절반을 죽여 이런 문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추진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무기를 얻는 과정에서 수많은 문명을 파괴하고, 심지어 자신의 딸도 희생시켰다. 그렇게 얻은 절대 무기를 사용해 목표대로 전 우주 인구 절반을 ‘핑거스냅’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는 이어 절대 무기를 파괴하고 초야에 묻혀 산다. 여타 탐욕스러운 빌런들과 달리 전 우주의 미래를 위해 나섰을 뿐이다.
45년 만에 군경을 동원해 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도 그의 주장대로라면 대한민국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본인을 희생하고 현직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초개처럼 버린 지도자다. 안온한 대통령 지위를 떨치고 일어나 반국가 세력으로부터 한국을 지키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윤 대통령은 탄핵심판 마지막 변론기일에 이번 계엄이 “과거의 계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무력으로 국민을 억압하는 계엄이 아니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라거나 “이 나라가 지금 망국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고, “주권자인 국민들께서 상황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함께 나서 달라는 절박한 호소”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결심은 우리가 지난해 12월 3일 밤부터 몇 시간 동안 지켜본 그대로다. 그렇게 당시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사람들에게 윤 대통령은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치 호수 위 떠 있는 달 그림자를 쫓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과 타노스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윤 대통령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 알고서도 국기 위기 상황에 대해 알리고 대국민 호소를 하기 위해 계엄 선포라는 ‘핑거 스냅’을 한 것이다. 타노스가 목표했던 건 다른 영웅들에 의한 또 다른 ‘핑거스냅’을 통해 그의 뜻과 반대로 원상 복귀됐지만 말이다. 그의 말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없었던 것처럼 보일 순 있다. 졸속 추진된 형사사법체계 개혁의 온갖 문제점과 지금까지 쌓여 왔던 정치권 및 법조계의 고질적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순기능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국가 위기에 대한 경고만 하고 아무 일 없었듯 원상태대로 돌아가 다시 국정을 운영하려 했다는 계엄 선포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것도 앗아갔다. 계엄 선포라는 '핑거 스냅'부터 탄핵심판 결론까지 약 4개월간 우리가 잃은 것을 다시 한번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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