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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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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시립도서관에서 독서 중인 시민들. 편성준 작가 제공
내가 도서관이라는 장소를 처음으로 뚜렷하게 인식한 곳은 정독도서관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험 기간이 되면 초등학교 친구 민석이와 함께 주말 새벽 첫 차를 타고 서울 삼청동에 있는 정독도서관 정문 앞에 가서 줄을 섰다. 입장료는 10원이었고 식당에서 50원을 내면 도시락을 말아 먹을 수 있는 따뜻한 국물을 내주었다. 시험공부가 명목이었으나 예나 지금이나 엉덩이가 가벼운 나는 문제집 풀이에 곧 싫증을 내고 참고 열람실에 가서 놀곤 했다. 교과서를 자습하는 학생들의 열기로 가득한 일반 열람실과 달리 참고 열람실은 여유롭고 널찍한 책상 위에 신문이나 잡지를 펼쳐 놓고 하루 종일 노닥거릴 수 있어서 좋았다. 열람실에 맡긴 가방을 찾을 때 내 이름을 대지 못해 무안해하던 기억도 난다. 사서 누나가 이름을 말해야 가방을 준다고 하길래 "아까 가명을 썼는데 제 이름이 기억 안 나요"라고 대답해 비웃음을 샀다.
고등학교 때는 야간자율학습을 하거나 독서실에 다니느라 좀처럼 도서관에 갈 틈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책을 많이 읽어야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책 읽을 시간을 주진 않았다. 나는 시험 기간이 되면 독자적으로 두꺼운 소설책을 한 권씩 독파했다. 게오르규의 '25시', D.H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같은 작품은 그때가 아니었다면 못 읽었을 것이다. 대학생이 되자 친구들은 도서관에서 책은 읽지 않고 토익이나 토플, 상식 공부만 죽어라 했다. 그들은 일반 열람실에서 소설책을 펴놓고 있는 나를 별종 취급했다. "나는 성준이가 부럽다"며 야유를 보내는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대책이 불분명하기로는 나도 마찬가지'라고 항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대학 내내 전공 공부는 팽개치고 '쓸데없는' 책만 들입다 읽는 바람에 학점이 모자라 취직도 겨우 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친구들은 광고회사도 공채로 떳떳하게 들어갔지만 나는 '사채' 또는 '잡채' 출신이라 자조하며 입사동기 없는 회사생활을 해야 했다.
충남 보령시립도서관 내부. 편성준 작가 제공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려면 어떤가. 좋아하는 책과 술만 있으면 어느 곳이든 견딜 만했다. 월급이 나오니 원하는 책을 사는 것도 예전보다 쉬워졌고 회사 도서관에도 책은 많았다. 나는 광고 카피를 쓰면서도 '쓸데없는' 책 읽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란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그리고 사실 카피라이터에게 쓸데없는 책이란 없었다. 출판평론가 이중한의 말처럼 나의 독서는 필요한 정보만 취하는 '아스피린식 읽기'가 아니라 기초체력을 꾸준히 기르는 '비타민적 읽기'였다. 그런 태도 덕분인지 회사를 그만둔 첫해에 에세이집을 낼 수 있었고 이후 글쓰기 책, 내 책꽂이에 있던 책들을 소개하는 책, 필사책 등 해마다 책을 써서 총 다섯 권의 저자가 됐다. 이 모든 게 도서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은 작가가 된 편성준이 아니라 아직도 독자로 남아 있는 편성준이다. 루이스 보르헤스는 "천국은 필시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말하며 도서관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표현했고 닐 게이먼은 "도서관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가느다란 붉은 선이다"라고 정의했다. "책은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는 칼 세이건의 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멋진 말들 뒤에 내가 뭔가를 덧붙일 생각은 없다. 그저 오늘도 우리 동네에 있는 충남 보령시립도서관에 가서 마음대로 책을 읽고 또 빌릴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2021년 2월부터 써 온 칼럼을 오늘 마감합니다. 꼬박 4년간 지면을 내어주신 한국일보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삶과 문화'를 열심히 읽겠습니다. 저는 소년한국일보 '비둘기기자' 출신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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