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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의, '사람을 살린다'는 자긍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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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였다. 골반이 부서지고 복부 출혈이 있었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의식이 또렷했다. 의료진은 통상적 절차에 따라 수액과 혈액을 보충한 후 환자를 수술대로 옮겼다. 중환자실 전공의였던 카림 브로히에게 맡겨진 일은 마취과 전문의를 도와 겁에 질린 환자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마취약이 투여되고 잠에 빠져들기 직전 아이가 머리맡에 앉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 괜찮은 거죠?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죠?" 브로히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괜찮지. 괜찮고말고."
수술을 위해 골반과 복부를 열었을 때 소녀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당황한 의료진은 혈액과 수액을 소녀의 몸속에 쏟아붓다시피 하면서 출혈을 잡아보려 안간힘을 썼다. 이게 웬일인가. 이제는 환자의 눈과 입, 그리고 온몸의 구멍에서 체리 에이드처럼 새빨간 피가 솟구쳤다. 의료진이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온몸으로 토해내는 빨간 액체를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소녀는 수술대 위에 오른 지 45분 만에 죽음을 맞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쓰라린 경험은 20대 젊은 의사의 연구 방향을 틀게 했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은 그때까지 의학계가 알고 있던 상식을 뒤엎는 내용이었다. 핵심은 바로 외상 환자들에게서 흔히 일어나는 혈액 응고력 문제였다. 즉 부상이 심각한 환자일수록 혈액 응고가 서서히 일어나고, 이로 인해 외과적 조치 자체가 어렵거나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점을 브로히가 새로 밝혀낸 것이다.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의료진이 소녀의 몸에 쉬지 않고 투입한 수액이 그나마 더디게 응고되던 혈액을 전부 씻겨 나가게 한 셈이었다. 수술받던 소녀가 온몸으로 피를 쏟아내며 죽어간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중증외상 의학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로열런던병원 '트라우마 과학센터' 설립자인 카림 브로히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란 책에서 고해성사처럼 털어놓은 이야기다. 그가 자기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의 묘지라고 표현했던 이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 건 OTT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를 보면서였다. 드라마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은 쉬지 않고 달린다. 현실성 없는 설정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피투성이로 실려 오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병원 복도를 내달리는 그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지난 일 년 병원에 자주 들락거리며 만난 의료진의 모습이 드라마 속 인물들과 자꾸 겹쳤다. 8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끝낸 후 차근차근 환자 가족을 다독이던 의사의 충혈된 눈, 외래진료 중 응급 콜사인을 받고 두 차례나 복도를 내달리던 나이 든 신경외과 교수의 휘청이는 발걸음···.
열정이 순수할수록 상처도 깊다. 드라마에서 햇병아리 제자 양재원은 묻는다. 병원 경영진은 구조헬기마저 못 뜨게 막고, 사망자 가족은 소송을 제기하는 마당에 우리만 죽어라 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울먹이는 제자에게 백강혁은 대답한다. 이 일을 계속할 너만의 이유를 찾으라고, 그게 없으면 오래 버텨내기 힘들 거라고. 사명감이든 직업인으로서의 책무든 경제적 이유든, 그 모든 이야기를 떠받치는 동력이 무엇인지를 이제 나는 안다. 숱한 오해와 억측 속에서도 의사들을 버티게 해주는 힘은 바로 '사람을 살린다는 자긍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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