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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전두환을 사형에 처한다"... 다시 보는 내란 수괴 1호 대통령 재판

입력
2025.01.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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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 5·17 계엄, 5·18 사태 주도
검찰 '기소유예·공소권 없음' 뒤집고 기소
1심 사형→2심 무기징역 감형→대법 확정
18년 만에 심판 마무리했지만 특사로 석방
윤석열 대통령, '내란 수괴' 2호 피고인 기록

1996년 3월 11일 1차 공판이 열린 법정에 나란히 선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전 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6년 3월 11일 1차 공판이 열린 법정에 나란히 선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전 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6년 3월 11일, 만연한 봄기운과 달리 서늘한 긴장감이 감도는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 옥색 수의 차림에 안경을 쓴 수인번호 3124번이 옆에 선 1042번을 향해 고개를 기울여 귓속말을 건넨다.

"자네 구치소에서는 계란 후라이 주나?"

"안 준다."

"우리도 안 줘."

수의를 입은 채 맞잡은 두 손. 카메라 수십 대의 시선이 꼿꼿한 남자의 뒤태에 쏠렸다. 12·12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노태우의 내란·반란 재판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피해자들 고소에도 정부·검찰 "후세에 맡겨야"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법적 단죄의 불씨를 당긴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을 벌하지 않겠다는 현직 대통령의 말이었다. 취임 석 달이 지난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담화에서 문민정부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천명하면서도, 진상 규명은 역사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선 반발 여론이 들끓었다. 두 달 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 전직 군 장성 22명이 12·12 사태를 주도한 34명을 군 형법상 반란죄와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검찰에 고소했다. 이듬해 5월엔 5·18 피해자 322명이 과거 신군부 세력과 관계자들을 고소했다.

그러나 1994년 10월 나온 12·12 관련 검찰 수사 결과는 기소유예였다. "군사반란 행위는 인정되나, 기소할 경우 국론 분열을 재연함으로써 불필요하게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내란죄는 "국헌문란이나 정권 탈취 목적이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검찰은 5·18 무력 진압에 대해선 더 나아가 '공소권 없음' 결론을 내렸다.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1995년 7월 검찰은 "사법기관이 위법 여부를 판단할 경우 헌정 질서나 법 질서의 단절을 초래해 정치·사회적으로 중대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며 수사 종결했다.

골목 성명 발표→도주→구속

1995년 12월 2일 서울 연희동 자택 앞 골목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검찰 소환 방침에 정면 반박하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5년 12월 2일 서울 연희동 자택 앞 골목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검찰 소환 방침에 정면 반박하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검찰의 면죄부에 국민들 분노는 극에 달했다.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바닥을 친 민심을 달랠 필요가 있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결국 그해 11월 24일 민주자유당 총재로서 '5·18민주화운동법' 제정을 당에 지시했다. 논란이 되는 공소시효 문제부터 특별법으로 풀겠단 취지였다.

당시 노태우는 비자금 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 이미 구속수감된 상태였다. 기자들은 서울 연희동 골목에 진을 치고 반응을 살폈다. 몇 시간 뒤, 전두환은 법률고문인 이양우 변호사를 통해 "5·18 특별법은 소급 입법을 금지하는 헌법 위반"이란 논평을 냈다.

그러나 수사를 재개한 서울지검이 12월 2일 소환을 통보하자, 전두환은 준비해온 원고를 들고 취재진 앞에 섰다. 자택 골목에서 그는 "정통성 부인은 좌파운동권 주장"이라며 "현재 검찰의 태도는 다분히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으로 보여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뻗댔다.

그러면서 바로 차량에 탔다. 향한 곳은 서울지검이 아닌 서울 동작구 현충원. 5분간 참배한 후 곧장 자신의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내달렸다. 이를 도주로 간주한 검찰은 반란수괴 등 6개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밤 11시 23분 법원에서 영장이 발부되자 수사관 9명을 합천으로 내려 보냈다.

12월 3일 새벽,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돼 합천 고향집을 나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 보도사진연감

12월 3일 새벽,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돼 합천 고향집을 나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 보도사진연감

전두환이 머물고 있던 5촌 조카 집에 3일 새벽 6시쯤 도착한 수사관들은 경남경찰청 지원을 받아 집 안에 진입하려 했다. 하지만 마을 청년들이 스크럼을 짜고 강경히 가로 막는 탓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경찰이 "공무집행방해로 처벌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 끝에야 대문을 넘을 수 있었다.

전두환은 그때까지도 안방에서 누운 채였다. 수사관들이 '전 대통령'으로 예우하며 미란다 원칙을 고지한 후 범죄사실을 낭독하려 했지만, 이양우 변호사가 말렸다. 수사관 두 명이 양 팔을 낀 채 호송차로 이끌려 하자 전두환이 뿌리쳤다. 호송차는 오전 6시 37분 마을을 떠났다.

이동하는 내내 피곤한 표정이던 전두환은 천안 부근을 지날 땐 수사관들에게 "독립기념관은 내가 재임 중 만든 것"이라며 가보기를 권하기도 했다. 휴게소에 들르려고도 했지만, 경호차량과 취재차량이 뒤섞여 혼잡한 탓에 쉬지 못하고 오전 10시 37분 안양교도소에 도착했다.

민첩 수사에 신속 재판... 암표 방청권 등장도

1995년 12월 3일 전두환(오른쪽 두번째) 전 대통령을 태운 검찰 호송 차량이 안양교도소로 향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5년 12월 3일 전두환(오른쪽 두번째) 전 대통령을 태운 검찰 호송 차량이 안양교도소로 향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후 수사는 속전 속결이었다. 검찰은 같은 달 21일 반란 혐의 등을 달아 전두환과 노태우를 재판에 넘겼고, 한 달 뒤인 1996년 1월 23일엔 내란 혐의로도 추가기소했다. 다만 계엄 해제일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공소시효가 아직 살아있다고 판단하고 5·18 특별법은 적용하지 않았다.

헌정사 첫 전직 대통령들의 형사재판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80개 방청석 중 대부분은 피고인들의 친지와 지인들 차지였다. 생중계를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법원은 피고인의 방어권 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론사 카메라에 허용된 촬영 시간은 초반 1분 30초 남짓이었다.

법정을 가득 채운 팽팽한 긴장감은 낮 12시 무렵 폭발했다. 방청석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향해 고함을 지른 강민조씨를 전두환씨 아들들이 폭행했다. 강씨는 1991년 4월 26일 노태우 정권 타도 시위에 참여했다가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강경대씨 부친이었다.

재판부는 주 2회 기일을 열며 심리에 속도를 냈다. 온라인 추첨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라 방청권을 얻기 위해 법원 앞에서 2박 3일간 노숙을 하는 무리도 생겨났다. 심부름센터가 부르는 값은 한 장에 80만 원을 호가했다. 법정에 들어가기 위해 사활을 거는 건 기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1심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 22년 6개월

1996년 8월 5일 검찰은 전두환에게 사형을, 노태우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재판부의 보충신문에 "답하지 않겠다"고 입을 다물던 전두환은 최후진술에서 "정권이 바뀌었다고 정권의 정치적 시각과 역사관에 의해 과거 정권의 정통성을 시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변했다.

5쪽 분량 진술서 낭독이 끝나자 방청석에선 박수와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다. 이한열군의 어머니 배은심씨는 "우리 한열이를 왜 죽였느냐"며 고함을 지르다가 퇴정 당했다. 두 전직 대통령의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19일로 선고기일을 잡았다가 일주일 미뤄 26일 선고하기로 했다.

1996년 8월 26일 전두환(오른쪽 첫번째), 노태우(오른쪽 두번째) 전 대통령이 선고 공판 시작에 앞서 손을 잡고 서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6년 8월 26일 전두환(오른쪽 첫번째), 노태우(오른쪽 두번째) 전 대통령이 선고 공판 시작에 앞서 손을 잡고 서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6년 8월 26일엔 스산한 여름 비가 내렸다. 첫 재판 때와 다름 없이 전두환은 몸을 곧추 세운 채 피고인석에 들어섰지만,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은 숨기지 못했다. 노태우는 눈이 충혈된 채 상기된 모습이었다. 재판부의 신원 확인에 앞서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또 다시 손을 마주 잡았다.

154쪽의 판결문을 요약한 설명문을 읽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다.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긴 분량이었다. 주문을 읽을 순서가 되자, 김영일 재판장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피고인 전두환 사형, 추징금 2,259억 5,000만 원. 피고인 노태우 징역 22년 6월, 추징금 2,838억 9,600만 원"

전두환은 입술을 꽉 다문 채 눈을 감고 사형 선고를 들었다. 낮 12시 15분 공판 종료가 선언되자, 옆자리의 노태우 등을 두드리며 "수고했다"고 위로하는 여유를 보였다. 뒷자리 피고인들과도 일일이 악수하고, 무죄가 선고된 박준병 전 보안사령관에겐 "축하한다"는 인사를 전했다.

항소심서 '6·29 선언'으로 감형

만인지상의 권력자에게 사형을 내린 법원에 질문이 쇄도했다. 선고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 재판장은 "사건 자체가 정치성이 있다고 하지만, 사법적 판단을 받기 위해 법원에 넘어온 이상 법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깊이 연구하고 판결도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항소심에서도 검찰과 피고인 간 기싸움은 치열했다. 재판부는 증언을 거부해온 최규하 전 대통령을 강제 구인해 법정에 세웠지만 입을 여는 덴 실패했다. 검찰은 1심과 같은 구형량을 재판부에 요청했고, 전두환은 "본인의 부덕으로 국민 자긍심이 크게 훼손된 데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12월 16일 열린 선고기일에서 권성 재판장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법리는 존재할 수 없다"며 내란 종료시점을 1987년 6월 29일로 판단했다.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전두환에게 건의하겠다고 밝힌 날로, 5공화국 전체를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오른쪽 세번째), 전두환(오른쪽 두번째) 전 대통령 모습. 연합뉴스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오른쪽 세번째), 전두환(오른쪽 두번째) 전 대통령 모습. 연합뉴스

그러나 엄중한 꾸짖음과 달리 양형에 있어선 관대한 면모를 보였다. 재판부는 전두환이 6·29 선언을 수용해 뒤늦게나마 국민 뜻에 순종했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노태우에 대해선 "전두환을 따라 영화를 함께 누리고 업을 이은 죄는 용서할 수 없다"면서도 징역 17년으로 감형했다.

당시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자고로 항장은 불살이라 하였으니 공화를 위하여 감일등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은 것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국민 화합을 위해 선처한단 뜻이었으나, 전두환 본인 조차도 2017년 회고록에서 "난 6·29 선언으로 항복한 적 없다"며 "어이없는 표현"이라고 밝혔다.

2심 선고는 이듬해 4월 17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헌정사 최초로 대통령의 반란·내란죄에 대한 사법적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다만 내란 행위 공소시효 기산일은 1심과 같이 '비상계엄이 해제된 1981년 1월 24일'로 판단해 아쉬운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두 사람의 수형 생활은 길지 않았다. 8개월 뒤 전두환과 노태우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이후 노태우는 5·18 사태에 대한 사과의 뜻을 종종 비췄고, 2021년 10월 26일 먼저 눈을 감았다. 반면 전두환은 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다 한 달 뒤인 11월 23일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져 숨졌다.

1979년 12.12 쿠데타 이후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하는 신군부 세력.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노태우 전 대통령,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9년 12.12 쿠데타 이후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하는 신군부 세력.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노태우 전 대통령,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리고 2025년 1월 26일, 윤석열 대통령이 '12·3 불법계엄' 사태의 내란 수괴로 지목돼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에 앞서 기소된 '2인자'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재판은 29년 전과 같이 서울중앙지법 417호에서 열리고 있다. 현직 대통령의 내란 행위에 대한 헌정사 첫 판례가 어떻게 기록될지 주목된다.

최다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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