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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평양 표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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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그 결말이 극적이다. 2만 파운드가 걸린 내기에서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는 당초 예정한 ‘80일 이내’ 일주에 실패한 줄 알았다. 그러나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여행한 바람에 하루를 단축했다는 설정이 나온다. 지구 경도를 1˚씩 넘을 때마다 4분씩 현지 시간이 단축되므로, 지구를 한 바퀴 돈 뒤(4분 X 360)에는 해당 지역 표준시 기준으로 소요 시간(1,440분=24시간)이 하루 절약된다는 것이다.
□ 대부분 나라는 둥근 지구에서 국토 중앙을 지나는 경도를 자오선으로 삼아 표준시를 정한다. 즉, 낮 12시면 기준 지점의 태양 고도가 가장 높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낮 12시 30분쯤에야 가장 높아지는데, 일본 표준시(동경 135°)를 따르기 때문이다. 일부 꼼꼼한 역술인들이 역학 계산에서 태어난 시각의 간지(干支)를 정할 때 30분 오차를 두는 것도 같은 이치다.
□ 30분 오차는 광복 이후 다양하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쳤다. 1954년 3월 21일, 이승만 정권은 표준 자오선을 동경 127° 30'으로 변경하고 표준시를 30분 앞당겼다. 영국 그리니치천문대 기준 세계 표준시와의 차이를 9시간에서 8시간 30분으로 줄였다. 이 조치는 '시간의 해방', '시간 주권 회복' 등으로 평가되며 당시 크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군부가 집권한 1961년 8월 10일, 9시간 차로 복구됐다. 세계 흐름과 대한민국 일상을 맞출 필요성이 컸기 때문이다.
□ 표준시와 대외 개방과의 연관성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서부전선 포격 등 긴장이 고조됐던 2015년 8월 김정은은 '평양 표준시'라는 걸 만들더니, 북한 시간을 30분 앞당긴다고 발표했다. 그러더니 북미회담이 있던 2018년에는 돌연 135° 표준시로 환원했다. 2기 트럼프 행정부의 김정은 달래기가 본격화하고 있지만, 북한은 강경 자세로 맞받았다. 협상 몸값을 높이려는 것일 수도, 고도화한 핵무력을 믿고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김정은이 10년 만에 표준시를 다시 바꾸고, 한반도 긴장을 끌어올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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