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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가 처형한 무솔리니의 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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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2월 6일, 이탈리아 국가 파시스트당 수장 겸 왕국 총리 무솔리니가 내각 해산을 단행했다. 2차대전 전황이 불투명해지면서 각료 상당수가 전쟁에서 발을 빼려 한 데 대한 조치였다. 무솔리니의 후계자로 불리던 외무장관 겸 그의 사위 갈레아초 치아노(1903~1944)도 그중 한 명이었다.
치아노는 1차대전 전쟁영웅, 국가파시스트당 창당 주역이자 1922년 검은셔츠단 로마 진군에 앞장 선 코스탄조의 아들. 로마대 법대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정치에 입문한 그는 1930년 무솔리니의 딸 에다와 결혼한 뒤 중국, 이탈리아 영사와 공보부 장관 등을 거쳐 36년 외무장관이 됐다. ‘신로마제국’을 기치로 한 무솔리니의 국가 팽창주의 신봉자로서 35년 에티오피아 전쟁에도 전폭기 편대를 이끌고 참전했던 그는 무솔리니의 오른팔이자 후계자로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내심 히틀러를 경멸하던 무솔리니를 설득해 독일·이탈리아 동맹을 맺게 한 것도, 39년 독일이 이탈리아와의 ‘강철조약’을 무시하고 사전 협의 없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독일에 대한 경계심을 감추지 않던 장인에게 ‘이기는 편’과의 동맹이 유리하다고 부추겨 나치의 프랑스 함락 직후 참전을 감행하게 한 실질적 배후도 그였다.
1941년 말 소련의 반격으로 동부전선 전황이 불투명해지고 42년 이후 전선이 고착화하면서 추축국의 피해가 늘어나자 파시스트당 내부 이탈자들이 늘어났다. 외교적 실리주의자였던 치아노도 그 무리에 합류했다. 내각 해산 후 그는 바티칸 대사로 임명됐다.
북아프리카 전역을 제패한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던 43년 7월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대의원회의 불신임 결의 및 국왕의 해임 통보로 실각·연금됐다. 약 두 달 뒤 나치에 의해 구출된 그는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뒤 치아노를 포함한 대의원회 주역들을 집단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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