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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판치는 디지털 세계… 사교계 속인 상속녀의 허상은 사회가 만들었다

입력
2025.02.05 14:30
수정
2025.02.05 15:12
20면

연극 '애나엑스' 리뷰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연극 '애나엑스'. 글림아티스트·글림컴퍼니 제공

연극 '애나엑스'. 글림아티스트·글림컴퍼니 제공

현대인은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을 통해 세계와 소통한다. 이 작은 화면 속 세계는 일부를 전체인 양 꾸미고, 세계를 미화하거나 악화한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개되는 개인 역시 검열된 형상이다. 각자 거짓된 이미지를 소비하고 욕망하며 그것이 진실이기를 바란다. 연극 '애나엑스'는 미국 뉴욕 사교계를 농락한 애나 소로킨의 실화를 토대로 창작됐다. 2021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최신작이다. 2022년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 만들기'도 소로킨의 삶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애나 소로킨은 졸업은 하지 않았지만 영국 명문 예술대에서 공부했고 프랑스계 패션 잡지에서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자신을 부유한 상속녀 애나 델비라고 소개하며 상류층 모임에서 주목을 받았다. 재무 문서를 위조해 담보 없이 대출을 받은 그는 고급 호텔에서 장기 투숙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상류층 인사들은 애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비용을 대신 내주고, 빌려주면서 그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애나는 사기가 밝혀져 체포당하고 실형을 받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연극 '애나엑스'는 애나 델비에게서 영감을 얻은 캐릭터인 애나와 애나에게 이용당하는 아리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연극은 상류층만 드나드는 고급 클럽에서 마주한 애나와 아리엘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아리엘은 선별된 사람만 이용할 수 있는 데이트앱을 출시해 주목받고 있는 앱 제작자다. 그는 거침없고 도발적인 상속녀 애나에게 금방 매료된다. 애나 역시 기존 상류층과는 조금 다른 아리엘에게 관심을 갖는다. 꿈꾸지만 경험하지 못한 삶에 대한 동경과 거침없고 반항적인 애나의 태도는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아리엘은 밀린 애나의 호텔비를 대신 지불하면서도 사기당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많은 호텔비를 사소하게 여기며 잊고 지낸다고 생각하며 현실의 경제적 감각을 초월한 애나에게 감탄한다.

사라질 걸 알지만 거부 못 하는 허황된 꿈

연극 '애나엑스'. 글림아티스트·글림컴퍼니 제공

연극 '애나엑스'. 글림아티스트·글림컴퍼니 제공

연극은 애나의 성장사를 비교적 세세히 보여준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예술에 대한 사랑이나 러시아 석유 재벌의 딸이라는 오해 때문에 생긴 사교계 인사들의 관심, 서서히 사람들의 욕망에 눈떠 가는 이야기를 애나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더불어 아리엘의 관점도 크게 부각된다.

애나 소로킨을 다룬 콘텐츠는 주로 호사가의 관심을 받을 만한 기행에 가까운 사기극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연극 '애나엑스'는 '애나 델비'라는 허상이 탄생하게 된 욕망의 실체를 탐구한다. 인물 자체보다 애나를 만들어낸 사회 배경에 관심을 둔다. 재벌 상속녀의 이미지에 취해 현실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과, 거짓 욕망을 사실처럼 만들어내는 기술 문명을 비판하는 것이다.

애나는 사기가 밝혀지고 구속된다.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아리엘은 고민 끝에 애나를 면회한다. 애나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미안함이나 죄의식이 없이 아리엘을 대한다.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아리엘이 믿고 싶었던 것을 믿게 해주었다는 듯. 둘은 하나의 단어를 엇갈려 말하며 문장을 만들어내는 게임을 즐겼는데, 면회실에서 이 게임을 통해 미완의 문장을 만들어낸다. "나를 짓누르는 눈송이 같은 꿈." 막대한 부에 대한 동경과 일탈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 이 문장은 부질없이 녹아버릴 줄 알면서도 끝내 거부하지 못하는 허황된 꿈같은 현대인의 욕망에 대한 은유다.

소재와 메시지 면에서 연극은 현대인의 세속적 욕망을 시의적으로 잘 담아낸다. 다만 작품 곳곳에서 내레이션으로 이끌어가는 대목이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눈에 보이는 거짓을 믿지 않으려 하는 아리엘의 태도가 흥미로웠는데, 그러한 상황과 감정까지 쌓아가는 과정의 세심함은 부족했다. 거대한 휴대폰 액정 화면을 여러 대 세워둔 것 같은 무대는 현대의 기술 문명으로 손쉽게 거짓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상황을 보여준다. 하지만 차가운 디지털적인 공간은 여러 겹의 인간적 욕망을 다루는 작품의 흐름과 종종 섞이지 못했다. 애나 역에는 최연우, 한지은, 김도연, 아리엘 역에는 이상엽, 이현우, 원태민 등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스타 배우가 다수 캐스팅됐다. 3월 16일까지 LG아트센터 U+ 스테이지에서 공연한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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