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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할매'와 치매 노인 춘자씨가 노래로 전하는 삶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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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라이브 제공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늙어가며 죽음에 이른다. '나이 듦'은 인간이 태초부터 타고난 숙명이다. 초고령사회 문턱에 접어든 한국 사회에서 노년의 삶을 숙고하게 하는 두 편의 뮤지컬이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렸다. 두 작품은 늙어가는 것이 단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삶의 지혜가 쌓이고 아픔도 슬픔도 포용해 유연해지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27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은 칠곡 문해학교에서 여든이 넘은 나이에 글을 배우고 시를 썼던 할머니들의 실화를 재구성해 만든 뮤지컬이다. 팔순 넘어 글을 배우는 개성이 뚜렷한 네 할머니의 이야기가 중심에 놓인다. 가난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제때에 배움의 시간을 갖지 못한 네 할머니는 여든이 넘어 한글을 배운다. 글을 배우는 것보다 소풍 갈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고, 핑계만 생기면 언제든 술판을 벌일 준비가 돼 있는 못 말리는 '팔곡리 사총사'다. 예산 삭감으로 문해학교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교사 가을은 할머니들에게 시를 써서 세상에 알리자고 제안한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라이브 제공
할머니들이 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첫사랑이자 이제는 먼저 떠난 '화상'이 된 남편을 떠올리고, 접어 둔 꿈을 찾아내며, 평생 트라우마였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평생 뒤로 밀려나고 분한 마음을 삭이며 살았던 삶을 되돌아본다. 이들의 사연은 각자의 시로 태어난다. 할머니들의 솔직하고 담백한 시는 뮤지컬 넘버로 태어났다. 트로트와 힙합까지 인물의 상황과 찰떡으로 맞물려서 자연스럽게 극을 이끄는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은 뮤지컬의 재미를 십분 살린다.
팔곡리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가난한 시대를 살아 왔던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속 끓던 사연에 코끝이 찡하고 호호백발이 되어 처음으로 교복을 입은 모습에 눈시울을 적시게 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엉뚱한 할머니들은 유쾌한 웃음으로 긍정적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시시껄렁한 농담에 장난만 치는 철없는 할머니 같다가도 죽음과 늙음을 받아들이는 속 깊은 할머니의 유연한 삶의 태도 앞에서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유쾌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와 음악을 돋보이게 한 건 배우들의 맛깔나는 연기다. 할머니의 행동, 말투를 섬세하게 살려내며 극에 몰입시켰던 배우들의 연기는 작품의 매력을 더한다.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김호근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3월 30일까지 더줌아트센터)는 일흔 살 생일을 맞은 춘자씨가 느슨해진 정신줄을 타고 나온 영혼의 물고기를 따라 판타지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치매 증세가 있는 춘자씨는 자신의 이름도, 꿈도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영혼의 물고기를 따라 7세가 되기도 하고, 100세를 미리 겪기도 하면서 고단한 삶 속에서 잊고 살았던 꿈과 아픈 기억을 만나게 된다.
작품은 춘자씨의 판타지 여행과, 춘자씨를 찾아다니는 자식들의 노력을 교차해 보여준다. 판타지 장면과 현실이 다르면서도 유사하고 겹쳐지게 설정해 연결시켰다. 장면 전환 때마다 다양한 역할로 등장하는 야쿠르트 아줌마, 부동산 아저씨, 피아노 학원 선생님 등 일인 다역 인물들은 짧은 순간 등장하지만 판타지에서 현실로의 전환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긴장을 일시적으로 풀어 주는 희극적 장면인 '코믹릴리프'로서 유쾌한 웃음을 준다.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김호근
착하고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트로트, 보사노바, 록 등 다양한 스타일로 공들인 착한 음악으로 들려준다. 그래서인지 극적 요소가 강한 작품임에도 음악성 짙은 노래들로 음악극적 느낌을 준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가물거렸던 춘자씨는 끝내 놓지 못하고 평생을 따라다녔던 아픔의 실체를 깨닫고, 기억하지 못했던 꿈을 되찾는다. 이러한 서사의 전개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알면서도 가슴이 뭉클하고, 알면서도 눈물이 핑 돌게 하는 작품이 있는데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대한민국이지만 공연계는 젊은 층을 겨냥한 작품 일색이다. 공연계 주된 관객이 20, 30대 여성이기 때문이다.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전 연령층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완성도 높은 뮤지컬의 등장이 반갑다. 이를 계기로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작품들이 등장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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