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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자비로 마침내, 동성애(자)를 포용한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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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책 '신약의 윤리적 비전'이란 책에서 동성애를 "신의 사랑의 목적에서 멀어져버린 (...) 비극적 징후 중 하나"라고 규정했던 신학자 리처드 헤이스는 2024년 책 '신의 자비의 확장'에서 신의 자비는 끊임없이 이방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라며 , 성경 일부 구절을 들어 동성애(자)를 악덕으로 배척하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의 자비는 고정된 경계를 두지 않고 언제나 확장되는 자비"라고 말했다. 2018년 듀크대 강단의 헤이스. Duke University 사진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 1948.5.4~ 2025.1.3)는 북미 보수 신학계의 주요 거점인 듀크대 신학대학원 학장을 지낸 저명 신학자이자 안수받은 목사다. 그는 후기구조주의 문학 비평의 주요 방법론인 상호텍스트성을 성서 연구에 적용해 신학의 세계를 확장했고, 성서를 문학적 비유와 상징의 총체적 내러티브(이야기)로 이해· 분석함으로써 대중적으로도 큰 호응을 얻었다. 마지막 저서를 뺀 그의 책 대부분은 한국어로도 번역 출간돼 있다.
1996년 그는 ‘신약의 윤리적 비전(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이란 책을 출간했다. 현대 사회 및 교회의 주요 갈등과 현안-폭력, 이혼, 낙태, 동성애 등-의 윤리적 지침을 신약 에서 모색한 책. 북미 최대 복음주의 잡지인 ‘Christianity Today(이하 CT)’가 현대 종교사상 형성에 기여한 20세기 고전 필독서로 꼽은 그 책에서 그는 동성애를 “신의 사랑의 목적에서 멀어져버린, ‘망가진 백성(broken people)’임을 보여주는 여러 비극적 징후 중 하나”라고 진단하며 남녀 간의 결혼만이 성서가 규정한 ‘(유일한) 규범적 형태(the normative form)’라고 썼다.
1980년 예일대 역사학자 존 보스웰(John Boswell, 1947~1994)이 촉발한 ‘교회-동성애’ 이슈로 교회가 한창 들썩이던 무렵이었다. 동성애자 가톨릭 신자였던 보스웰은 방대한 사료를 근거로 집필한 ‘기독교, 사회적 관용, 동성애(Christanity, Social Tolerance, and Homosexuality, 1980)’란 책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역사 전반에 걸쳐 동성애자를 정죄하지 않았고, 적어도 12세기까지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거나 동성 간의 사랑을 축복했다”고 밝혔다. 그의 책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이듬해 전미 도서상과 스톤월 도서상을 수상했고, 당시까지 동성애 문제에 거의 관심조차 두지 않던 보수 신학계와 교단을 분노로 결집시켰다. 공교롭게도 1981년 AIDS 사태가 시작됐고, 힘든 상황에서도 보스웰의 편에서 성서를 다시 펼쳐 드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로마서와 레위기 등 동성애를 비판하는 성서 일부 구절의 해석을 둘러싸고 두 진영의 대립이, 물론 현저히 치우치긴 했지만 격화하던 와중이었다. 미국 북동부의 자유주의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게이 역사학자 보스웰과 달리 헤이스는 남부 바이블벨트 출신의 모태 신앙인이면서도 교회의 타락과 옹졸함을 경계하며 진보적 변화를 역성들던, 그래서 진보 신학계에도 영향력을 미치던 신학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헤이스가, 초고를 두고 저명 신학자들과 폭넓게 토론하고 자문까지 받아 저 책을 출간한 거였다.
영국 성공회 고위 성직자 겸 권위 있는 신학자 N.T 라이트(Nicholas T. Wright)는 그의 책을 “참된 인간성과 진정한 신성의 초기 기독교적 비전을 보여준 허리케인 같은 책”이라고 극찬했고, 듀크대 기독교 윤리학자 스탠리 하워워스(Stanley Hauerwas)는 “신약을 이해하는 교재로서 그의 책보다 나은 자료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평했다. 동성애에 대한 그의 1996년 진단은 가히 최종심급의 권위를 누리며 보수 성직자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구절 중 하나가 됐다.
28년 뒤인 2024년 9월 헤이스는 자신의 1996년 진단을 사실상 전면 부정하며 ‘신은 동성애를 죄악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담은 새 책 ‘신의 자비의 확장(
The Widening of God’s Mercy)’을 출간, 또 한번 엄청난 파문의 중심에 섰다.
풀러신학대학원 교수인 아들 크리스토퍼(이하 크리스)와 함께 쓴 저 책에서 그는 성경에 기록된 여러 ‘말씀’과 삽화들을 근거로, 먼저 신학계와 신자들의 통념인 ‘신(성)의 불변성’을 반박하며 “성경에는 끊임없이 생각과 판단을 바꾸는 신의 초상으로 가득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96년의 자신처럼) 성경의 특정 구절에서 도덕적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옳지도 않다”며 “성경은 하나의 내러티브로 총체적으로 읽고 이해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신의 진짜 모습(메시지)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신의 자비는 고정된 경계를 두지 않고 (…) 끊임없이 확장되며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자비”라고 결론지었다.
리처드 헤이스의 1996년 책 번역본(왼쪽 사진)과 신학자인 아들 크리스와 함께 지난해 9월 출간한 책 표지.
헤이스 부자는 마태복음의 안식일 일화(마태 12장) 즉 굶주린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고, 예수가 손이 곱은 환자를 치료한 일 등을 인용했다. 예수는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하신 (신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 율법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다.
신이 베드로에게 로마군 백부장을 만나 예수의 말을 전하라 계시한 일화도 환기했다.(사도행전 10장) 베드로는 이교도와의 교류를 금한 계율과 관습을 깨고 신의 뜻에 따라 백부장을 만났고 거기에 성령이 임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뒤 예루살렘의 동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신을 막으려 했던 나는 누구였는가?” 사도행전의 저자는 베드로의 고백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
헤이스는 2024년 11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금 성소수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며 ‘신을 막으려는 우리는 누구인가?’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유대인에게 (이방인과의) 테이블 교제는 지금 일부가 생각하는 (동성)섹스만큼이나 금기시되는 심각한 일탈이었다”며 “저 에피소드는 이방인도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운 충격적인 일이었다”고 부연했다.
히브리서 13장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라는 구절을 깃발처럼 휘두르며 신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 신이 사울을 왕에 앉힌 것을 후회하는 대목(사무엘서 15장)이 곤혹스러울 것이라고도 했다. 헤이스는 성경의 신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수시로 변하고 수정·적응하며 (…) 끊임없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역동적인 신”이라고 말했다. ‘츨롭핫의 딸들’이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을 권리를 요구하자 곤혹스러워진 모세가 신에게 해법을 묻자 신이 “그게 옳겠다”고 답하는 구절(민수기 27장)도 있다. 아들 크리스는 인간이 신(성서)과 맺어야 할 관계의 본질이 ‘대화’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라며 “신은 늘 경청하며 은혜로 응답하는 역동적이고 인격적인 신”이라고 말했다.
책에 대한 평가는 또 한번 극명하게 엇갈렸다. 켄터키주 남침례신학교 R. 앨버트 몰러(R. Albert Mohler Jr.) 총장은 “(소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신학의 완전한 항복 선언”이라 비판했고, 저명 보수신학자 로버트 개그넌(Robert A.J. Gagnon)은 “헤이스가 이단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영국 신학자 라이트는 “인간의 성에 대한 신의 입장이 변화할 수 있다면 1996년 책의 다른 항목, 예컨대 비폭력에 대한 입장은 안 바뀌리라 어떻게 확신하는가” 반문했다. 헤이스는 “내 대답은 성경으로 돌아가 인간에 대한 신의 연민이 어떻게 펼쳐져왔는지 살펴보자고 제안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답했다. “신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구원을 원하시며 그것이 역사를 통해 보여준 신의 방식이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바로 그 신이다.” 2024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헤이스는 자신이 그랬듯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이들의 입장도 이해한다며 신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고 당장 설득할 의도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주변의 신실한 성소수자 신자들을 알아가는 데 시간을 들여달라고, 그런 뒤에 다시 대화하자고 제안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낸 듀크대 미국종교사 교수 케이트 보울러(오른쪽)는 어느 해 학내 부활절 예배에서 리처드 헤이스의 설교를 들은 뒤 함께 찍은 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리며 그를 추억했다. "리처드, 당신은 항상 주님의 이름으로 살고 죽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죠.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인스타그램 @katecbowler
리처드 B. 헤이스는 1948년 남부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나 3세 무렵 부모가 이혼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성장했다. 어머니는 감리교회 오르간 연주자였고, 2차대전 미 공군이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던 무렵 소비에트가 봉쇄한 서베를린에 생필품을 실어 날랐다.
고교 시절 “교회와 교인들의 위선에 질려” 교회를 등졌던 그는 예일대 영문학과에 진학한 뒤 교목(校牧)이던 장로교 목사 겸 반전 인권 운동가 윌리엄 슬로언 코핀(William Sloane Coffin, 1924~2006)의 헌신을 경험하며 조금씩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2학년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온 그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크리스마스이브 예배에 참석했고, 무심코 펼쳐 든 성경 속 한 구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마가 8장)가 가슴에 사무쳤다고 한다. 그는 다시 교회를 찾았고 1970년 대학을 졸업한 뒤 매사추세츠의 한 고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예일대 신학원에 진학했고, 에모리대 신학원에서 신약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예일대 교수 방식은 학부시절 밀턴과 예이츠를 읽고 배우던 방식과 딴판이었다. 성경 형식과 텍스트-내러티브의 작동 방식 및 의미보다 텍스트의 세부를 분석하고 시대 배경 등을 해부하는 데 치중하더라는 것. “마치 셰익스피어 수업을 들으면서 완성된 작품의 문학적 의미는 고려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가 모색하고 평생 견지한 원칙이 총체적 텍스트로서의 성경 읽기-이해였다. 그는 법전을 읽듯 어떤 논지를 지탱해줄 ‘증거'를 찾는 방식의 성경 독해를 특히 경계했다. “헤이스는 타석에 설 때마다 홈런을 쳤다”는 1999년 CT의 평처럼, 그의 책들은 늘 큰 반향과 호응을 얻곤 했다. 성경 한 구절의 해석을 두고 정론과 이단이 엇갈리곤 하던 중세 이래 신학계의 엄격하고 삼엄한 논쟁 무대에 은유와 환유, 메타포 등 문학적 분석 툴을 도입하고, 성경 속 수많은 선지자와 사도들의 말과 행위, 사건의 시대-역사적 배경 등을 꿰고 있지 않고는 쉽사리 시도하기 힘든 상호텍스트 연구를 본격화한 그였다. CT는 “회의론자들조차 그의 (성경에 대한) 접근 방식을 거부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의 영혼의 품위 때문이다. (…) 그는 유연하고 명쾌하면서도 무척 설득력 있고 무엇보다 박식하다. 그의 주장에서 허점을 찾기란 무척 힘들다”고 평했다.
“신의 자비는 고정된 경계를 두지 않으며 (…)
끊임없이 확장되는 자비다.”
리처드 헤이스, 2024년 책 'The Widening of God's Mercy'
하지만 정작 그는 2000년대 초부터 1996년 책의 '허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동성애자 제자들을 만나면서, 한때 록 뮤지션이 꿈이었던 그가 기타리스트로서 봉사하던 노스캐롤라이나 더럼(Durham)의 교회 선교봉사단 게이 단장의 신앙 생활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1996년 책도 '증거찾기식' 성경 독해의 결과물은 아닌지 회의하게 됐다는 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열한 깔봄(ugly condescension)’과 “적대적 우월감(smug hostility)’으로 성소수자 신자들을 배척하는 보수 교회들의 행태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목회자 다수가 자신의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리라 의심했다. 1996년 책에도 그는 “동성애자들이 신의 말씀을 좇아 독신으로 머무는 한 교회는 그들을 수용해야” 하며 “시민권 문제에 관한 한 교회가 동성애자를 악의적으로 차별하기 위해 선별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쓴 바 있었다.
그는 2010년대 후반 가족들과의 저녁 모임에서 자신의 오랜 고민을 토로하며 아들 크리스와 함께 저 사안을 다시 살펴보기로 약속한다. "신학(자)의 책임은 사도와 선지자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근거로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찾아 행하는 것"이라던 독일 신학자 칼 바르트(Jarl Barth)의 말도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게 부자의 연구가 시작됐다, 격려와 논쟁과 반박이 거듭됐다. 크리스가 구약 챕터를, 그가 신약 챕터를 맡았다. 원고를 서로 바꿔 읽으며 “잠깐, 이렇게 말하면 안 돼. 이건 다르게 생각해봐”라고 말하는 일이 잦았고, 초고 여백에 크리스가 “내 이름이 필자로 기록된 책에 이런 말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메모를 남긴 적도 있었다. 그렇게 10년 넘게 이어진 연구의 결과가 2024년 책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헤이스는 "‘아비에게 불순종하는 아들을 돌로 쳐 죽이라’는 성경 구절을 실천했다면 내겐 이 책을 함께 쓸 아들이 없었을 것"이라고 농담했다.
헤이스는 그 책을 “참회의 한 실천”이라고 말했다. “변화는 무척 힘든 일이지만, 그것은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참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metanoia)’는 생각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난해 9월 CNN 저널리스트 라이언 스트뤼크(Ryan Struyk)와의 인터뷰에서도 헤이스는 “교회에서 배제당한 수많은 성소수자들의 고통을 야기한 데 대해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 인터뷰이인 스트뤼크도 게이였다. 미시간주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교회를 집처럼 여기며 성장한 그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달은 뒤부터 두려움과 함께 온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감에 시달려야 했다고 기사에 썼다. “헤이스의 1996년 책 동성애 챕터를 몇 번이나 거듭 읽었는지, 교회 목사들의 설교로 그 구절을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헤이스는 1970년 주디 치크(Judy Cheek)와 결혼, 크리스 등 1남 1녀를 두었다. 그는 2015년 췌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 기도로 회복, 학교에 다시 복직했다가 2018년 은퇴했다. 요컨대 그의 '참회'는 실존의 완성이었다. 그가 책을 집필하던 무렵 암이 재발했고, 지난해 8월 폐 전이 진단을 받았다.
지난해 10월 말 댈러스 월셔 침례교회에서 열린 격년제 ‘센터피스(CenterPeace) 콘퍼런스’ 무대가 그의 마지막 대중 행사였다. 참회와 깨달음의 고백 끝에 그는 ‘동성애자를 포용하는 데 반대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자신의 부고가 신문에 실리기 전에 책을 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그건 내 자의식 때문이 아니라 (신과 자신의)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객석의 한 여성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합니다.” 엄숙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헤이스는 조용히 그를 향해 고개 숙이며 기도의 합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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