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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해해야 할 것은 내 사진이 아니라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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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진작가 올리비에로 토스카니는 패션기업 베네통사의 아트디렉터로서 기업 광고를 다양성과 포용, 평화와 공존 등 사회적 이슈의 미디어로 활용하며 마케팅-액티비즘의 새 장을 개척했다. "광고 사진작가가 아니라 광고를 이용한 사진작가"였던 그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광고 미디어는 '상품 홍보' 이상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여겼고, 충격적인 사진 이미지에 불쾌해하거나 분노하는 이들에게 "정말 충격스러워해야 할 것은 사진-광고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반박하곤 했다. 2016년의 토스카니. AP 연합뉴스.
작가 밀란 쿤데라가 예술적 비평 행위를 두고 한 말이지만, 사실 인간은 누군가를 평하면서 의도치 않게 스스로 발가벗곤 한다. 1965년 문을 연 이탈리아 패션기업 베네통 그룹이 “컬러(color)로 세상을 매혹”했다는 한국 경제단체 ‘자유기업원’의 평가는, 그런 점에서 순하게 말해 평면적이고 터놓고 보자면 이념적 편협의 자백이라 할 만하다.
이탈리아 변두리의 작은 가족기업이 단숨에 세계 굴지의 패션 기업이 된 배경에는 스웨터의 화려한 색상 못지않게 강렬하고 파격적이었던 마케팅 이미지의 힘이 있었다.
유대인과 무슬림 청년이 다정하게 어깨동무한 사진(1986), 세 개의 심장 사진 위에 ‘white- black- yellow(백인- 흑인- 황인)’란 단어를 얹은 사진(1996), 아시안계 입양아를 안고 나란히 앉은 흑백 레즈비언 커플(1990), 보스니아 내전 전사자의 피 묻은 군복 사진(1994)… 기업-제품 광고의 틀을 깨고 공익 광고로, 더 나아가 종교적 금기와 차별 등 사회적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화제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숱한 사회운동 마케팅((marketing activism) 사례들.
그런 광고들로 1980, 90년대 베네통의 전성기를 이끈 아트디랙터 겸 사진작가가 올리비에로 토스카니(Oliviero Toscani, 1942. 2. 28~2025. 1. 13)다. 자칭 ‘경제자유지상주의 단체’ 인 자유기업원은 2000년대 이후 베네통사의 침체를 두고 “(토스카니의) 사회적 주제 사진들이 소비자들에게 ‘세상은 모두 잘못되었다’라는 메시지를 주어 베네통에 대한 지겨움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하는 비판도 있다”고 썼지만, 오히려 그가 없었다면 베네통이 단숨에 그처럼 널리 알려지기 힘들었으리란 평가가 온당할 것이다. 그가 재임한 1982~2000년 베네통사 매출은 20배 넘게 폭증했다.
사회학자 다니엘 벨이 양립 불가능한 자본주의의 세 왕국이라 칭했던 효율의 경제, 평등의 정치, 자아실현의 문화를 광고-사진으로 아우르며, 대처리즘-레이거노믹스의 신자유주의-경제지상주의 기조에 맞섰던 자칭 '최악의 광고 사진작가' 토스카니가 별세했다. 향년 82세.
1981년 말 베네통사 창업주 중 한 명인 당시 CEO 루치아노 베네통(Luciano Benetton, 1935~)이 백지수표를 들고 토스카니를 찾아왔다. 토스카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보세요 루치아노, 나는 홍보 대행사도 필요 없고 마케팅 연구도 안 할 겁니다. 오직 내 생각대로 일할 겁니다. 새로운 걸 원한다면, 기존의 룰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됩니까?” 루치아노는 약혼녀를 비롯한 가족 경영진의 반발을 무지르고 그를 채용했다.
시작은 순탄했다. 1984년 그는 각기 다양한 색상의 베네통 스웨터를 입은 여러 피부색 어린이 단체사진 위에 “세상의 모든 색(Tutti colori del mondo)’이란 문구의 광고를 선뵀다. 차이와 화합의 저 카피에서 베네통사는 현재의 회사 이름(United Color of Benetton)을 얻었다.
이듬해 광고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미국과 중국, 그리스와 튀르키예, 아르헨티나와 영국 등 분쟁-갈등을 빚던 두 나라 어린이가 자국 국기를 들고 어깨동무한 사진 시리즈였다. 로널드 레이건이 중국 조어대에 여장을 풀고 알코올 120도짜리 마오타이주로 겁없이 건배했다가 눈물까지 글썽인 이듬해였다. 그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다가 소련 국기와 성조기를 든 두 나라 어린이의 키스 사진-광고를 보고 보좌관에게 “그런데 베네통이 누구야?’라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
토스카니가 기획한 베네통 광고들. 사진 위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임종 직전의 데이비드 커비 사진 광고, 동일한 심장 사진으로 인종 차별을 비판한 광고, 수녀와 신부의 키스 사진으로 종교의 엄숙주의를 비판한 광고, 흑백 레즈비언 커플과 동양계 입양아 사진 광고, 흑인 여성이 백인 아이에게 수유하는 사진 광고. world.benetton.com
토스카니의 광고는 1989년 흑인 여성이 백인 아이에게 수유하는 사진, 흑백 두 청년이 나란히 수갑을 찬 뒷모습 사진 등으로 조금씩 격렬해졌다. 전자의 사진은 백인 우월주의자뿐 아니라 흑인 유모의 노예제 폐습을 떠올린 일부 흑인들의 반발을 샀지만, 아마 다수는 그 취지에 공감했을 것이다. 그는 이듬해 흑인과 백인 레즈비언 커플이 동양계 입양아를 사이에 두고 찍은 사진으로 반차별 메시지를 증폭시켰다. 동성애 코드도 당연히 선구적이고 충격적이었다.
그해 밀라노 델 두오모 광장에는 흑백의 두 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란히 변기에 앉은 사진 광고판이 펼쳐졌다. 교회 당국은 주말 신자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며 광고판을 철거하게 했다. 토스카니는 이듬해 수녀와 신부 복장의 두 모델이 키스하는 사진, 교황과 이맘이 포옹하는 사진 등으로 ‘유머’를 수용하지 못하는 교회의 엄숙주의를 비판했다. 교황청은 분노했고 이탈리아 당국은 광고 자체를 금지했다. 탯줄 달린 신생아 사진 광고가 등장한 것도 1991년이었다. 주제는 ‘생명의 찬미’였다지만 인간 종의 특권의식에 어깃장을 놓으려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탈리아 당국은 “지나친 날것의 이미지”란 이유로 그 광고도 금지했고, 영국과 아일랜드 등 일부 국가도 규제에 동참했다. 훗날 토스카니는 “영국이 특히 유별났는데, 그들은 갓난 강아지 사진은 좋아하면서 아이는 좋아하지 않더라”고 말했다.
그런 해프닝과 논란이 빚어질 때마다 베네통 광고는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더 널리 알려졌고, 더러 벌어진 불매운동에도 불구하고 매출은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베네통과 토스카니의 위선, 즉 광고를 위해 ‘가치’를 이용한다고 폄하하는 이들도 물론 있었다.
1990년대 초 AIDS가 미국 25~44세 남성 사망 원인 1위로 급부상하면서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도 극심해졌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보건당국도 실질적인 대책 없이 타락한 일부의 문제로 치부하기에 급급했다.
토스카니는 남녀 모델의 엉덩이 등 신체 부위에 후천성 면역결핍증 양성 판정을 상징하는 ‘H.I.V’ 도장을 찍은 사진들로 전 세계 베네통 광고판을 도배했다. 도축장 고기 등급 판정 혹은 나치의 유대인 낙인에 빗대 AIDS 환자 및 HIV 보균자에게 사회적 죽음을 선고하는 행태에 대한 통렬한 풍자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동성애자 단체들이 자신들을 비인간화한다며 분노했다. 한 에이즈 환자는 병증으로 앙상해진 자신의 얼굴 사진과 함께 “고통 속에서도 장사는 지속된다.(…) 말기 에이즈 화자인 올리비에 베스나르-루소가 루치아노 베네통의 이익을 위해”라는 문구를 단 반박 광고를 신문에 내기도 했다. 토스카니는 1993년 12월 1일(세계 에이즈의 날)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 오벨리스크에 초대형 콘돔을 씌우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저 유명한 베네통사 컬러 콘돔이 출시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2007년 이탈리아 밀라노와 프랑스 파리 패션위크에 맞춰 기획한 한 패션기업 광고판 앞에 선 토스카니. 거식증으로 깡마른 여성 모델의 누드 사진으로 패션업계의 가학적인 관행과 풍조를 비판했다. AP 연합뉴스
1990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말기 에이즈 환자였던 동성애자 활동가 데이비드 커비(David Kirby, 1957~1990)의 임종 직전 사진을 게재했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Bill) 품에 안겨 여윈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흑백 사진. 포토저널리즘을 공부하던 한 학생(Therese Frare)이 촬영한 그 사진에서 토스카니는 가톨릭 교회 예술의 주요 모티프인 ‘피에타’를 연상했다. 그는 커비와 가족들의 표정에 담긴 위엄과 슬픔을 부각하면서 최대한 사실적으로 이미지를 컬러화하라고 자신이 창간한 베네통 잡지 ‘COLORS’ 디자인팀과 색채 전문가들에게 의뢰, 1992년 베네통 광고 사진으로 썼다. 당연히 유족 동의를 얻어 진행한 프로젝트였지만 “기업 이윤을 위해 한 남성의 고통을 상품화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커비의 아버지 빌은 기자회견을 자청 “베네통사가 우리를 이용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국가조차 나 몰라라 하는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울 기회라 여겼다는 거였다. 근년 그 사진은 ‘에이즈의 얼굴을 바꾼 사진’이란 평가를 받는다.
“당신들이 가장 불안(정)해지는 순간이
가장 창조적인 순간이다”
올리비에로 토스카니, marketing.ie
토스카니는 “광고는 현존하는 어느 미디어보다 유효하고도 강력한 의사 전달 수단이다. (…) 그래서 ‘우리 스웨터가 예쁘다’란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고, 자신의 사진을 두고 분노하거나 불쾌해하는 이들을 두고는 “누군가 도드라진 뭔가를 행하면 반드시 반발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라고 일축하곤 했다.
1993년 내전 중이던 사라예보의 한 대학생이 그에게 편지를 썼다.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세상이 주목하지 않으니 당신이라도 뭔가 해달라는 청을 담은 편지였다. 그는 크로아티아 적십자사를 통해 전사한 병사의 군복 한 벌을 구한 뒤 그 피 묻은 군복 사진을 1994년 베네통 광고에 활용했다. 하지만 군복 주인(Marinko Gagro)은 머리에 수류탄 파편을 맞아 전사했지만, 군복에는 가슴 부위에 총상흔이 있었다. 사진을 조작했다는 의혹과 비난이 빗발쳤다.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그의 광고가 늘 '문제적'이진 않았다. 그는 사이사이 교통 안전, 가정폭력 근절, 떠돌이 개를 모델로 한 반려동물 유기 실태 고발 등 무해한 광고들로 베네통 광고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해소하곤 했다.
토스카니는 2000년 사형제 반대 메시지를 담아 미국의 사형수들을 촬영한 사진을 광고에 썼다가 살인자를 희생자로 미화한다는 비판과 함께 시어스(Sears) 등 대형 소매 체인업체들이 잇달아 계약을 철회하는 사태를 빚었고 그 와중에 회사를 떠났다. 일부 매체는 그가 경질됐다고 보도했지만 토스카니는 “직원 임금과 휴가 관리 등 일상 행정 업무에 짓눌리던 때였다. 그 광고를 끝으로 퇴직하기로 미리 회사와 합의돼 있었다”고 말했다. 베네통을 떠나며 그는 직원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염려해 지레 위축되지 마라(…) 당신들이 가장 불안(정)해지는 순간이 가장 창조적인 순간이다”라고 말했고 “창의적이기 위해선 심각하게 불안정해지는 지점까지 나아가야 한다. 가장 안정적인-뻔한 것은 언젠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뿐”이라고도 말했다.
토스카니는 2차대전 중이던 1942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교외 산골 농촌 피란지에서 성장했다. 이탈리아 최대 일간지인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의 사진기자였던 아버지(Fedele Toscani) 영향으로 6세 무렵 선물 받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준 게 카메라만은 아니었다. 파시즘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무솔리니가 아버지에게 ‘당신은 왜 (검은셔츠단의) 검은 셔츠를 안 입느냐’고 묻자 “검은색이 나랑 안 어울린다”고 답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45년 그는 밀라노 광장에 매달린 무솔리니의 시신 사진 특종기자였다.
1997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의 콜레오네 언덕에서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취한 토스카니. 저명 포토저널리스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6세 무렵부터 카메라를 갖고 놀기 시작했다. AP 연합뉴스.
토스카니는 1961년 스위스 취리히 응용예술학교에 진학해 사진과 응용디자인을 전공했다. 1965년 영국 디자이너 메리 퀀트의 미니스커트 의상 발표회 등을 취재했고, 1970년대 패션 사진작가로서 보그와 엘르, GQ 등 여러 패션 잡지 사진작가로 활약하다 베네통에 합류했다.
그는 자신은 광고 사진작가가 아니라 광고를 매체로 활용한 사진작가라고 주장하곤 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전통적인 광고는 ‘당신이 이 제품을 사면 보다 아름다워지고 성적으로 돋보일 것이라고 선전하지만, 그런 헛소리 같은 건 세상에 없다”고 말했고, “(내가 광고 사진가라면) 최악의 광고사진가다. 다른 이들은 동의를 추구하지만 나는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할 뿐이다”라고도 말했다. 그는 “모든 사진은 정치적”이라고 주장했고, 같은 논리로 그에겐 모든 것이,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도 본질적으로는 광고였다.
평생 유명 모델이나 배우를 모델로 고용한 적이 없는 그였다. 베네통을 떠난 뒤 세계보건기구(WHO) 금연캠페인 등을 제작하던 그는 2007년 ‘놀리타(Nolita)’란 패션 브랜드의 의뢰를 받고 처음 직업 모델을 채용했다. 거식증을 앓던 프랑스 모델 이사벨 카로(Isabelle Caro, 1982~2010)였다. 아름다움과는 사뭇 동떨어진, 참혹하리만치 마른 카로의 누드 사진은 그 무렵 이듬해 봄&여름 시즌을 겨냥한 밀라노와 파리 패션위크 분위기를 급랭시켰다. 브라질 출신 만 21세 모델(Ana Carolina Reston)이 신경성 폭식증과 거식증을 번갈아 앓다가 숨진 직후이기도 했다. 숨질 당시 레스톤은 키 168cm에 몸무게 40kg(BMI지수 14.1)이었고, 사진을 촬영하던 무렵 카로는 신장 165cm에 몸무게 32kg이었다. 카로 역시 3년 뒤 숨졌다.
당시 프랑스 쿠튀르연맹 회장(Didier Grumbach)이 AFP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금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악용한 선정주의의 극단적 사례를 보고 있다”며 토스카니와 ‘놀리타’를 맹비난했다. 토스카니는 “정작 끔찍한 것, 우리가 끔찍하게 여겨야 할 것은 광고-사진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반박했다.
2018년 루치아노가 CEO로 복귀하면서 토스카니도 다시 베네통사에 합류했고, 그해 총선에서 진보 정당인 이탈리아 민주당(PD) 의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그해 8월 지중해 연안 도시 제노바(Genova)의 교량 하나(Ponte Morandi)가 붕괴해 43명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베네통사의 건설 계열사(Atlantia)가 관리하던 다리였다. 방송 인터뷰에서 토스카니는 자기 업무와 무관한 사고의 책임을 따지는 데 격분해 “다리 하나 붕괴된 걸 누가 신경 쓰나?”라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뒤늦게 “인격적으로 망가진” 자신이 수치스럽다며 사과했다.
2000년 베네통을 떠난 그는 이탈리아 중서부 투스카니(Tuscany) 교외에 정착, 제자들을 가르치며 자신만의 사진 작업을 이어갔다. 말년의 그는 난치성 단백질 대사질환인 아밀로이드증을 앓았다. 그는 세 번째 아내(Kirsti Moseng Toscani)와 함께 낳은 3남매 등 6남매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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