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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을 권리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존엄하게 살 권리를 위해 헌신했다"

입력
2025.02.25 04:3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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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험프리(Derek Humphry, 1930.4.29~ 2024.1.2)

영국인 저널리스트 데릭 험프리는 1975년 말기암 환자였던 아내의 존엄사를 도운 뒤 그 과정을 78년 책 'Jean's Way'로 출간, '조력 자살' 공론화에 첫 불을 지핀 인물이다. 그는 80년 북미 최초의 존엄사 및 조력 자살 옹호단체 '헴록 소사이어티'를 창립했고, 존엄사의 실용적 바이블로 꼽히는 책 'Final Exit(1991)'를 썼고, 97년 미국 오리건주의 존엄사법 제정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2009년의 험프리. 위키피디아

영국인 저널리스트 데릭 험프리는 1975년 말기암 환자였던 아내의 존엄사를 도운 뒤 그 과정을 78년 책 'Jean's Way'로 출간, '조력 자살' 공론화에 첫 불을 지핀 인물이다. 그는 80년 북미 최초의 존엄사 및 조력 자살 옹호단체 '헴록 소사이어티'를 창립했고, 존엄사의 실용적 바이블로 꼽히는 책 'Final Exit(1991)'를 썼고, 97년 미국 오리건주의 존엄사법 제정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2009년의 험프리. 위키피디아


에로스(생의 의지)와 함께 타나토스(파괴-죽음의 의지)를 인격적 신으로 창조한 고대인들은 죽음을 향한 불온한 끌림이 생명 안에 내재돼 있다는 걸 알 만큼 지혜로웠고, 또 그걸 인정할 만큼 정직했다. 인류가 신화와 종교의 여러 상징을 통해 생과 사를 불가역적 우열의 이분법 위에 두고 죽음-이후를 한사코 배척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자살은 살인에 준하는 범죄였고, 근대 사회는 저 오래된 관습법을 실정법으로 계승했다.
전쟁과 범죄를 제외하고, 인류 역사상 ‘조력 사망(assisted death)’의 가치를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사유한 이들은 유감스럽게도 20세기 초 우생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인류 복지와 사회 진보의 그럴싸한 해법으로 열등 인자의 번식-생존을 부정하고자 했고, 그 선택을 뒷받침할 윤리적 알리바이를 모색했다.

알려진 바 ‘조력 사망’의 법-제도적 타당성을 논의한 최초의 사례는 20세기 초 미국 오하이오주 여성 애나 소피나 홀(Anna Sophina Hall)이 전개한 캠페인이다. 말기 간암 환자 어머니를 오래 간병한 그는 어머니의 조력 사망을 허락받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고, 주의회 법안 상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06년 주의회는 79 대 23으로 법안을 부결됐다.
당시 신문 자료 등을 조사해 2004년 미국 의학사회보에 저 사실을 공개한 브라운대 역사학자 제이컵 아펠(Jacob M. Appel)에 따르면, 당시 찬반 논쟁은 지금 전개되는 생명 존엄-윤리 공방과 달리 주로 실용적(경제적) 타당성에 근거해 전개됐다. 소피나 홀은 어머니의 유일한 상속자였고, 그의 주된 논거는 간병 비용의 낭비였다.
광의의 안락사-존엄사 논의는 2차대전 홀로코스트의 야만을 경험하면서 삼엄한 금계(禁戒)로 봉인되다시피 했다.

존엄사 권리와 가치를 새롭게 모색하며 어렵게 실천한 여러 사람의 삶을 이 코너에서 소개한 바 있다. 종교학자 겸 개신교 목사로서 ‘이단’ 낙인까지 감수하며 헌신한 제럴드 라루(Gerald Larue, 1916~2014). 다발성경화증으로 굳어가는 몸으로 2014년 영국 의회를 설득해 조력 자살 합법화의 길을 연 데비 퍼디(Debbie Purdy, 1963~2014). 미국의 선구적 자살 연구자 겸 자살 예방 활동가 노먼 파버로(Norman Farberow, 1918~2015)를 소개하며 함께 언급한 ‘자유 죽음’의 작가 장 아메리(Jean Amery, 1912~1978) 등.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사회와 국가-이 적으나마 늘어난 것은 존엄사의 방점이 죽음이 아니라 존엄에 있고, 삶-죽음의 신적 섭리에 과정의 고통까지 조건화된 건 아닐지 모른다는 회의와 각성이 공감을 얻어온 덕일 것이다.

종교와 윤리, 법의 견고한 봉인을 찢고 아메리가 76년 ‘자유 죽음(원제는 ‘자살에 대하여: 자발적 죽음에 대한 담론’)’으로 존엄사의 윤리를 세상에 알렸다면, 조력 자살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설득하며 인류 실존의 로드맵에 새로운 길을 연 주역은 78년 논픽션 ‘진의 길(Jean’s Way-A Love Story)’을 쓴 영국인 저널리스트 데릭 험프리(Derek Humphry, 1930.4.29~ 2025.1.2)다.
데릭은 말기 유방암 환자였던 아내 진의 뜻을 존중, 75년 약물로 아내의 임종을 도운 뒤 자신과 진이 겪은 고통과 번민, 법의 강제에 대한 이성적 갈등 등을 저 책에 썼다. 그는 1980년 존엄사 권리와 조력 자살 옹호를 위한 선구적 단체 '헴록 소사이어티(Hemlock Society)'를 창설해 이끌며 94년 미국 최초로 오리건주의 조력자살법 제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가 별세했다. 향년 94세.

20세기 존엄사-조력 자살 논의의 시발점이 된 험프리의 1978년 책 'Jean's Way'와 91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Final Exit' 표지. 왼쪽 표지 속 여성이 영국 맨체스터 '미스 윈센쇼(Miss Wynthenshawe)' 출신인 진 험프리다. amazon.com

20세기 존엄사-조력 자살 논의의 시발점이 된 험프리의 1978년 책 'Jean's Way'와 91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Final Exit' 표지. 왼쪽 표지 속 여성이 영국 맨체스터 '미스 윈센쇼(Miss Wynthenshawe)' 출신인 진 험프리다. amazon.com

1975년 3월 29일 아침, 만 43세 생일을 갓 지낸 진이 남편 데릭에게 “오늘이 그날이어도 괜찮겠느냐?”며 “오후 한 시쯤 떠나려 한다”고 말했다. 4년 전 진단받은 유방암 종양이 뼈로 전이돼 의사도 손을 놓은 상황이었다. 만 22년을 함께하며 아들 둘을 낳고 셋(막내는 입양)을 키운 부부는, 언젠가 더는 방법이 없고 더는 못 견딜 만큼 통증이 심해지면, 그래서 진이 요청하고 그도 동의하면, 진의 마지막을 돕기로 약속했다. 그게 약 9개월 전이었다. 데릭은 지인인 한 의사를 어렵사리 설득해 넉 달 전 약(바르비투산염)을 구했다.
마지막 반나절, 부부는 둘의 추억과 남겨질 가족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고, 진이 데릭의 재혼을 허락하기도 했다고 한다. 약속한 시간, 데릭은 아내가 가장 아끼던 머그잔에 밀크커피를 담아 건넸다. 치사량의 약과 진통제에 설탕을 듬뿍 탄 커피였다. 단숨에 잔을 비운 진은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네곤 이내 의식을 잃었고 약 50분 뒤 숨졌다.
저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데릭은 안도했다고, 만일 약이 부족해 진이 깨어나면 어쩌나 걱정했다고 책에 썼다. “그 모든 고통 끝에 진은 평화롭게 영면했다. 나는 상실감으로 멍한 상태였지만 아내가 보여준 용기와 결단력, 마지막 순간의 품위에 무척 숙연했다.

영국 런던 선데이타임스 기자였던 데릭은 앞서 진의 부탁을 받은 직후 신문사 자료실에서 조력 자살 관련 파일을 모조리 읽었다. 그는 배우자 등의 자살을 도운 혐의로 기소된 이들이 당시에도 적지 않았지만 유죄 판결을 받고도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실을 확인했고, 실형을 면할 수 있다는 희망보다 법의 부당함에 어이가 없었다. 당시 영국 형법(1961년 자살법)에 따르면 자살 방조 행위는 최대 14년형에 처할 수 있는 중범죄였다.

데릭은 영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미국 여성 앤 위케트(Ann wickett, 1942~1991)와 76년 재혼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78년 LA타임스 기자가 된 그는 의사와 간호사, 과학자와 윤리학자, 장의업자 등을 인터뷰해 ‘미국인의 죽음의 질(The Quality of Dying in America)’이란 제목의 연재 기사를 썼다. 틈틈이 써온 원고의 출판에 드물게 동의해준 영국 런던의 작은 출판사(Quartet)를 통해 ‘Jean’s Way’를 출간한 것도 그해였다. 책은 출간 2주 만에 초판이 매진되는 등 큰 반향을 얻었고, 유럽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이듬해 미국서도 출간됐다. 영국 검찰은 서면조사 등을 통해 약물을 제공한 의사가 누군지 캐물었지만 그는 끝내 함구했고, 검찰은 그를 불기소 처분했다.

그에겐 독자 편지가 쇄도했다. 남편의 생애 마지막 8주의 ‘공포’를 견뎌야 했다는 한 독자는 ‘진의 길’을 부러워하며 “얼마나 더 많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문대로 가능한 한 모든 방법으로 생명을 연장함으로써 의료계가 강요한 그 끔찍한 죽음을 경험해야 했어요”라고 썼다. 실용적 도움과 조언을 청하는 편지도 적지 않았다.

그는 80년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그해 8월 아내 앤과 함께 LA프레스클럽에서 ‘헴록 소사이어티’ 창립 기자회견을 열었다. 샌타모니카 자택 창고가 그들의 첫 사무실이었지만, 당시 그들 곁에는 협회 초대 회장을 맡아준 제럴드 라루 목사와 의사 출신 법률가 리처드 스콧(Richard S. Scott) 등 동지들이 있었다.

존엄사 옹호단체 '헴록 소사이어티'를 모티브로 조력 자살을 둘러싼 여러 인물의 사연과 갈등을 풍자적으로 그려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는 2012년 동명의 인도 영화 포스터. 위키피디아

존엄사 옹호단체 '헴록 소사이어티'를 모티브로 조력 자살을 둘러싼 여러 인물의 사연과 갈등을 풍자적으로 그려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는 2012년 동명의 인도 영화 포스터. 위키피디아

데릭은 81년 ‘Let Me Die Before I Wake’란 100쪽 분량의 책을 출간했다. 의사 등 전문가 자문을 거쳐 실질적인 자살 방법 등을 소개한, 팸플릿이 아니라 정식 출간된 최초의 자살 가이드북이었다. 첫 6개월 동안 협회 회원들에게만 판매하던 책이 입소문이 났고, 일부 서적 판매상과 도서관의 요청에 따라 그와 협회는 이듬해 일반 판매를 시작했다. 에이즈(AIDS) 진단이 사형선고처럼 여겨지며 미국 사회가 패닉에 빠져들던 무렵이었다.
그는 강연과 인터뷰, 캠페인 등을 주도하는 한편, 아내 앤과 함께 존엄사의 역사를 개괄한 책 ‘The Right to Die’(1986) 등을 잇달아 출간했다. 출범 10년 만인 1990년 협회는 미국 주요 도시에 90여 개 지부를 두고 약 5만 명(일부 보도에 따르면 3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거대 조직이 됐다.

89년 앤이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유방암 수술을 받은 지 불과 20일 만에, 화학요법을 시작한 지 나흘 만에 데릭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게 앤의 주장이었다. 당시 47세의 앤은 “나는 이제 죽음의 세계에 지쳤고,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관계는 소원했다”고 “13년을 함께 보낸 아내가 암 진단을 받자마자 데릭은 패닉에 빠져 도망치기 급급했다”고 밝혔다. 59세의 데릭은 앤의 “변덕스러운 기분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잦은 적대감 탓”에 꽤 오래전부터 둘 사이가 공허하고 위태로웠다며 “앤의 암 진단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지푸라기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86년 데릭과 함께 노화로 병치레가 잦던 자기 부모의 존엄사를 도운 뒤 ‘Double Exit’(1989)란 책까지 썼던 앤은 저 무렵 부모의 조력 자살 직후 스스로가 살인자처럼 느껴졌다고도 말했다.
90년 이혼한 앤은 소송 과정에서 데릭과 협회가 자신을 정신 질환자처럼 매도했다며 600만 달러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 중이던 이듬해 오리건주의 한 황무지에 주차한 차 안에서 음독자살했다. 당시 앤의 암은 진정 국면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크라테스의 독초로 유명한 ’헴록'을 단체 이름으로 제안했던, 협회 창립 주역 중 한 명인 앤의 데릭(과 협회)에 대한 비난으로 협회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협회는 뉴욕타임스 광고를 통해 “슬프게도 앤은 생의 많은 나날 동안 정서적 문제로 시달렸다”며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은 헴록이 긍정하는 조력 자살의 범주에 결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데릭은 91년 ‘마지막 비상구(Final Exit)’란 책으로 저 어지러운 논란을 정면 돌파하며 존엄사 운동에 새로운 획을 긋는다. 존엄사 및 조력 자살의 윤리와 함께 의사를 찾는 방법서부터 관련 법률, 보험 등 준비 절차, 다양한 자살 방법, 호텔에서 결행할 경우 봉사료(tip)를 남겨두라는 조언까지 담은 200여 쪽 분량의 책이었다.

쇼핑몰 체인서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존엄한 죽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애나 퀸들런(Anna Quindlen), 1991.8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책은 단숨에 뉴욕타임스 ‘조언’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해선 무려 18주간 리스트에 머물렀고, 신문은 그 '기이한 현상'을 장문의 기사로 분석했다. 미네소타대 생물윤리학자 아서 캐플런(Arthur Caplan)은 긍-부정을 떠나 “말기 질병으로 숨져가는 이들이 받아온 의료서비스에 대한 맹렬한 항변”이라고 진단했다. 퓰리처상(논평 부문)을 수상한 저널리스트로서, 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주연한 영화 ‘원 트루 싱(1998)’의 원작인 동명의 자전소설을 쓴 애나 퀸들런(Anna Quindlen)은 별도 칼럼에서 청소년이나 범죄자, 우울증 환자 등이 책의 정보를 오용할 우려가 있다는 각계의 비판과 우려에 대해 “우리에겐 이미 총이 있고 지붕 있는 창고와 로프도 있다”며 책을 두둔했다. 그는 “각자의 삶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해온 모든 것을 앗아가고 고통과 수치의 죄수로 만드는 특정 질병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에게 그의 책은 “불안으로부터 안정감을 되찾고자 품는 애착물(security blanket)처럼” 미지의 두려움과 공포에 맞서게 해주는 방편일 수 있다고 썼다. 그는 호기심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이유로 그 책을 간직하기로 했다며 이런 문장으로 칼럼을 맺었다. “우리는 책의 내용을 두고 걱정하기보다 쇼핑몰 체인서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존엄한 죽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백악관 생명윤리위원장을 지낸 의사 겸 의료윤리학자 리언 카스(Leon R. Kass) 등은 그의 책을 악마의 유혹이라며 맹비난했다. 카스는 칼럼에서 “이 책은 한마디로 악이다. 나도 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읽지 않기를 바란다. 결코 쓰여서는 안 되는 책이고 소개 기사뿐 아니라 품위 있게 리뷰될 자격도 없는 책”이라고 썼다. 책은 한국어(절판)를 포함 1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고, 2007년 USA투데이는 20세기 마지막 사반세기에 출간된 가장 주목할 만한 책 25권 중 하나로 선정했다.

데릭 등이 80년 협회를 창설한 궁극적 목적은 존엄사 및 조력 자살 합법화였다. 협회는 법률가 등 전문가들과 함께 80년대 중반 미국 최초의 존엄사 모델 법안 ‘인도적이고 존엄한 죽음을 위한 법(Humane and Dignified Death Act)’을 마련, 1988년과 92년 캘리포니아에서, 91년 워싱턴D.C.에서 각각 주민 발의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그러곤 97년 오리건주에서 마침내 성공했다.

오리건주 법 제정 캠페인에 누구보다 앞장서며 입법 청원을 위한 정치활동위원회(PAC)에 가장 먼저 기부금을 낸 데릭은, 하지만 당시 지도부가 주의회 등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법안 내용을 대폭 후퇴시켰다며 반발했다. 예컨대 법은 조력 자살 의사에게 약 처방권만 부여하고 처치를 금했다. 데릭은 주사를 놓을 힘이 없는 이들, 약조차 삼킬 수 없는 인후암 말기 환자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019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이 과도했고, 정치적 측면에서 지도부의 전략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며 “벨기에나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의 법에 비해 완벽하진 않지만 좋은 첫걸음일 수 있다”고 말했다.
데릭 험프리는 92년 협회 사무총장직에서 사임한 뒤 비영리 ‘안락사 연구 및 안내 기구(RRGO)’를 설립 운영하며 저술 및 강연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그레첸 크리커(Gretchen Cricker)와 재혼해 해로했다. 미국은 오리건주를 시작으로 워싱턴, 몬태나 등 10개 주와 워싱턴D.C.가 조력 자살(사망), 즉 '임종 의료 지원'을 합법화했고 2024년 기준 일리노이 등 19개 주가 관련 법 제정을 위한 심의에 나섰다.
오리건주 존엄사법 캠페인 주역인 ‘Death with Dignity’의 CEO 펙 샌딘(Peg Sandeen)은 “데릭은 죽을 권리가 아니라 존엄하고 자율적으로 살 권리, 불필요한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자비롭고 인도적이며 개인적인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마감할 권리를 얻기 위해 헌신했다”고 기렸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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