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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정의와 문명적 정의

입력
2025.02.1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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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코튼 매더- 2

세일럼 마녀 재판을 묘사한 19세기 석판화. 위키피디아

세일럼 마녀 재판을 묘사한 19세기 석판화. 위키피디아


(이어서) 미지의 것에 대한 내면의 공포와 광기, 종교적 야만의 극치인 마녀재판이 17세기 신대륙 이주민들에게는 '집단의 정의'였다. 동시에 별의 운행을 알고 바이러스와 백신의 원리를 이해하던 당대 일류 지식인 매더의 ‘정의’이기도 했다.
그는 ‘유령 증거’ 즉 마녀에게서 해를 입었다는 피해자(고발자)가 특정인(마녀 용의자)의 형상을 한 유령을 보았다고 하는 주장이 용의자의 생사를 가르는 근거로 얼마나 허술하고 위험한지 알 만큼 이성적이었지만, 그 이성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신의 나라로서 온전히 지켜져야 한다는 열정을 압도하진 못했다.
세일럼 마녀 재판은 1692년 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매사추세츠 세일럼타운과 인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전개됐다. 10대 소녀들의 간질 발작으로 시작된 마녀 사냥의 광기는 200여 명의 기소로 이어졌고, 30여 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그중 19명(여성 14명)이 교수형당하는 참극을 낳았다.

광기의 배경 및 전개에는 토지 경계선 등을 둘러싼 초기 정착민들의 이권 분쟁, 성차별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바탕에는 아일랜드계 가톨릭 교도에 대한 청교도들의 종교적 불신과 경계심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녀 재판에 대한 권위의 승인이 있었다. 코튼 매더는 재판부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저질러진 혐오스러운 마법행위를 적발하기 위한 우리의 존경하는 통치자들의 부지런하고 열심인 노력이 성공할 수 있도록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도와준 데 대해 모든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기괴하고 악의적인 사악함의 발견이 완성되기를 기도합니다.”
악마를 부정하는 것은 천사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마녀의 실존을 의심하는 것은 스스로 이단임을 인정하고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할 것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인류는 복수와 응징의 원시적 정의뿐 아니라 종교적 정의와도 대립하면서 문명적 정의의 원칙을 구축해왔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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