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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를 떠받치는 무덤들

입력
2025.02.14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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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심판은 헌법 본질에의 질문
헌재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들
헌재가 왜 헌재인지 보여줄 때

문형배(가운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재판관들이 1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8차 변론'에 입장해 자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문형배(가운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재판관들이 1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8차 변론'에 입장해 자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헌법이 철학에 가까운 보편적인 개념들을 규정하는 만큼, 헌법재판소의 결정(판결)은 일반 법원보다 직관적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낙태죄의 위헌 여부는 시대 흐름과 가치관에 크게 좌우되며, 법률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나름의 논리를 펼칠 수 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등이 비법조인에게 재판관 자격을 개방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 한국에서도 같은 요구가 있어왔다.

사실 나는 우리 헌재의 여러 ‘기념비적 결정들’에 시큰둥하곤 했다. 합리적 상식을 가진 평균의 국민이라면 대부분 그렇게 결정했을 것인데, 그 위치에 있다는 것만으로 재판관들을 ‘영웅’으로 보는 것이 과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들도 꽤 있어서, 헌재의 역할은 늘 ‘그저 그런’ 최소한의 상식을 풀어내는 수준으로 보였다.

하지만 비상계엄 사건은 머릿속 고인 인식의 틀을 헤집고, 헌재가 헌재인 이유 또한 새롭게 가르친다. 헌재가 이렇게나 중요한 이유는 ‘특별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상식에 권한을 부여하는 역할’ 때문이란 걸 말이다.

사람은 특별한 것보다 평범한 것이 무너질 때 뿌리 뽑히고, 그 평범함을 지키기 위해 혹은 얻기 위해 싸우고 때로 그로 인해 죽는다. 민주공화국,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법 앞의 평등,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아름답고 평범한 말은 모두 우리 헌법에 쓰여져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재판관 3명 공석 시기에 계엄을 선포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민주공화국을 해체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빼앗은 포고령의 효력을 유지하려면, 무력화해야 할 곳이 바로 국회와 헌재다. 헌재가 재판관 공석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식물 상태가 아니었다면, 국회 봉쇄를 위해 보낸 무장 군대를 헌재에도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에 중립이 있는 양, 형사재판과 탄핵심판을 구별 않은 채 ‘절차’를 트집 잡고, 민주주의를 정쟁 대상으로 전락시키려는 이들이 가장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게 헌재다. 재판관들에 대한 인신 공격이 준동하고, 신체적 위협까지 우려되면서 경호도 강화했다. 헌재 무력화를 원하는 이들이 과격한 극우세력만은 아니다. 경제관료 출신인 한덕수 총리(전 대통령 권한대행)가 재판관 임명을 보류해 환율이 폭등하고 경제가 망가져 갈 때, 점잖은 ‘매국’의 얼굴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윤 대통령 탄핵 사건은 헌재의 본질, 그리고 헌법의 본질을 건드린다. 그래서 헌재가 이렇게 힘든 걸 것이다. 권력이 군을 동원해서라도 호시탐탐 사유화를 노리는, 국가 근간을 두고 벌이는 극한의 쟁탈전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헌재는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로 탄생했다. 그 당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는 26명 열사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분신·고문·의문사로 젊은 목숨들이 눈발처럼 떨어지던 시기를 우리는 거쳤다. 그 무덤들이 피워 올린 꽃이 대통령 직선제(민주주의)와 헌재라 하겠다.

이제와 다시 계엄 독재를 꿈꾼 윤 대통령의 파면(탄핵)이 헌재 손에 달린 건, 역사의 운명적 회귀가 아닌가. 이 힘든 고비에서 무덤의 주인들이 지켜보길, 그리고 지켜주길 바라본다.

이진희 사회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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