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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복면 판사?

입력
2025.02.1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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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의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의 여파로 20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경찰 등 관계자들이 출입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의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의 여파로 20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경찰 등 관계자들이 출입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처음 기자가 됐을 때 생소했던 점 중 하나는 ‘부장판사와 부장검사 이름만 기사에 명시하는 표기법’이었다. 언론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검찰 기사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서동재)’ 같은 주어로 시작하고, 법원 기사는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부장 강빛나)’ 정도의 형식을 따른다. 경찰 기사에 서장·과장 이름을 붙이지 않고, 부처 기사에 담당 국·과장 성명을 달지 않는 걸 보면, 이런 실명제는 판검사에게만 주어지는 일종의 특권이다.

□ 누구도 그렇게 쓰는 이유를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의미를 체득하게 됐다. 법관은 각자가 헌법기관으로서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사람이고, 검사 역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지녔다. 그들의 판결이나 기소는 ‘이름을 걸어야 할 만큼’ 중차대하다. 이름을 건다는 건 동시대의 비판은 물론이고, 향후 역사적 평가까지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를 밝히는 것과 같다. 실명제는 특권인 동시, 책임을 의미한다.

□ 기사에 바이라인을 다는 것처럼, 법관 이름을 명시하는 건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요즘 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받는 ‘현시적 위협’을 보면, 과연 법관 이름을 적고 대법관·헌법재판관의 개별 의견을 밝히는 게 적절한지 고민될 정도다. 욕설은 애교고, 가짜뉴스에 근거한 매도가 끊이지 않는다. 영장 발부 판사를 잡겠다고 법원을 수색하는 폭도마저 등장한 마당에, 탄핵심판 결과가 나오면 얼마나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지 짐작할 수도 없다.

□ 마약왕 에스코바르를 다룬 드라마 ‘나르코스’(에피소드 1-4)에는 테러 위협 때문에 판사가 복면을 쓰고 재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콜롬비아에선 1989년에만 48명의 판사·검사·변호사가 목숨을 잃었다. 법관이 복면을 쓰는 망국적 상황까지 이르진 않겠지만, 만에 하나 불상사라도 터진다면 법관 이름이 뉴스에서 사라지는 상황도 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판사가 특권을 잃는 게 아니라, 그들을 평가하고 견제해야 할 우리 권리가 사라진다. 다른 이의 양심의 자유를 위협하려는 모든 폭력적 시도가 그러하듯, 테러는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부메랑이다.

이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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