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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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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월 2일 베트남전쟁 전투에서 부상병을 헬기로 옮기는 청룡부대원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북한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에 전투병을 보냈다는 소식에 우리의 베트남 파병이 생각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파병이 지난해 60주년이었지만 아무 행사 없이 지나갔다. 젊은 세대는 잘 모르지만 이 전쟁은 우리가 참전한 아주 큰 전쟁이었다. 국군 32만5,517명이 나가서 5,099명이 숨지고 1만1,232명이 부상했다. 고엽제 피해자만 13만 명 이상을 남겼다.
경기도 광주에 사는 박유신씨(82)는 소총병으로 베트남에 갔다. "밤에 김포공항에서 수송기를 타고 현지에 도착할 때까지 어디로, 왜 가는지 몰랐다"고 했다. "디안의 진지에 와서야 전쟁터에 왔다고 알게 됐다. 그래도 6.25 때 3만6,000명이 희생한 동맹국 미국을 돕는다는 생각에 기꺼이 동의했다. 밤에 매복하며 진흙탕과 시궁창 늪에서 살았다. 포탄에 전우들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생지옥이었다. 우리 사병들이 주민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던 도장에 베트콩이 클레이모어를 터뜨려서 1개 소대원 전원이 몰살당했다. 고엽제 피해가 너무 심해 철수했다. 그래도 공산화를 저지하려고 희생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귀국해보니 우리 돈을 정부가 횡령했다고 해서 허탈했다"고 했다. "미국 정부가 미군 수준으로 우리 장병에게 지급한 급여의 10% 정도만 정부가 주고 90%는 국고로 돌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이런 분노와 슬픔은 참전자와 가족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 경기도 광명의 이영숙씨(77)는 "결혼을 약속한 남편이 군복무 중에 베트남에 가야 한다길래 울며불며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겨우 살아왔지만 고엽제로 병에 걸려 58세 때 숨졌다. 혼자서 아들딸을 시집 장가보내느라 온갖 고생을 다했다. 미망인들이 남편의 급여를 돌려달라고 소복을 입고 법정에서 울며 하소연을 했다. 재판도 시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고엽제 병을 물려받아 병든 자식들도 많다. 남편은 전우들이 숨진 베트남에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했는데…" 할머니는 눈물을 여러 번 닦았다.
세계월남참전전우한국총연합회의 김성웅 회장을 분당의 사무실에서 만나자 "우리 급여를 정부가 가져간 사실은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보고서(1978년) 등에 나와 있다"고 했다.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을 미워하냐고 묻자 "그분은 우리에게 크게 잘못했다"고 했다. "정부는 그 돈으로 고속도로와 산업단지 포항제철을 만들었다. 그 돈으로 나라가 잘 살게 됐다. 박 대통령은 비서들에게 '이 돈은 돌려줘야 한다.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으면 이자에 이자를 쳐서 갚아주라'고 했다. 당시의 이경희 사정비서관이 증언하고 사실확인서도 써줬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청와대도 국회도 국방부도 보훈처도 법원도 방송도 우리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우리는 도리어 양민 학살을 했다는 누명을 썼다." 그는 법정에서 분해서 고함을 치다가 여섯 달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야말로 국회에서 조사해야 하지 않는가? 그는 "의원들은 하는 시늉만 했다"고 했다. 그러면 국방부는? "거기는 우리가 늙어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다. 실제로 많이 죽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라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 노병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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