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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빨갱이인가

입력
2025.02.19 18:30
27면

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990년 5월 나라 전체를 들썩였던 영화 '남부군' 포스터. 빨치산 이야기를 그렸다. 포스터 속 붉은색으로 쓴 '빨갱이'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0년 5월 나라 전체를 들썩였던 영화 '남부군' 포스터. 빨치산 이야기를 그렸다. 포스터 속 붉은색으로 쓴 '빨갱이'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빨갱이와 빨치산. 뜻이 같은 말인 줄 알았다. 그 시절, 친구가 한 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빨치산은 산이야. 설악산, 태백산처럼. 지리산 근처에 있는 산인데, 거기에 빨갱이들이 살고 있대." 1980년대 초반 산골 중학생들은 주워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속삭거렸다. 빨치산이 산이 아니라는 건 대학에 가서야 확실히 알았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은 후였다. 빨치산의 말 뿌리가 러시아어라는 사실엔 적잖이 놀랐다.

오래전 기억을 불러낸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에 ‘빨갱이 명단’이 나돌고 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유재석, 아이유 등 연예인 이름도 들어 있다. 작가 한강도 명단에 올랐다. ‘대역죄인(친중·종북 공산당 빨갱이 명단)’이라는 제목엔 헛웃음이 절로 난다. 정치판의 말과 글이 몹시 요란하다. 품격이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다. 빨갱이의 뜻을 알기나 할까.

빨갱이는 광복 직후 좌우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 생겨난 말이다.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권력에 눈이 시뻘게진 정치인들은 정적을 없애는 도구로 '빨갱이'를 악용했다. 1948년 가을의 여순사건이 대표적이다. 빨갱이가 뭔지도 모르는 이를 빨갱이로 몰아 수없이 학살했다. 제주 4·3, 국민보도연맹, 3·15의거, 4·19혁명, 광주 5·18민주화운동에도 빨갱이를 들이댔다. 민주주의 깃발을 흔들어댔지만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자들의 비겁한 술수였다.

빨치산은 6·25전쟁 전후에 각지(특히 산)에서 활동했던 공산 비정규군을 이른다.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에서 비롯된 말이다. 프랑스어 ‘partisan’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말의 뿌리는 당파, 동지를 뜻하는 ‘파르티(parti)’다. 러시아인의 실제 발음 '빠르티잔'이 ‘빨치잔’을 거쳐 빨치산이 된 듯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적의 배후에서 통신·교통 시설을 파괴하거나 무기, 물자를 탈취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비정규군으로 설명한다.

우리말을 썼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린 이가 있다. 고 백기완 선생이다. 6·25전쟁 중의 일이다. 일본말 ‘하코방’이 몹시 싫었던 선생은 순우리말 '달동네'로 말하고 썼다. “일본 말을 싫어하는 걸 보니 네 뒤에 분명 빨갱이가 있다.” 당시 경찰이 선생을 때리며 내뱉은 어이없는 이유다. 그깟 발길질과 "빨갱이" 소리에 우리말 사랑을 멈출 선생이 아니다. 달동네에 이어 동아리, 새내기, 모꼬지 등 고운 우리말들이 선생에게서 계속 태어났다. 우리말 지킴이가 빨갱이라면 나도 기꺼이 되고 싶다.



노경아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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