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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이유? 100만 시민을 구하기 위해서"

입력
2025.02.28 11:30
수정
2025.02.28 13:57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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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성의 이슈메이커]
김재규 재심 청구 진행한 조카 김성신 교수
"모두들 박정희를 기리는 것처럼 말하지만
김재규의 의거를 칭찬한 사람들 또한 많다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내란' 누명 벗어야"

편집자주

한국의 당면한 핫이슈를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지난 25일 서울 역삼동 한 카페에서 김재규의 조카 김성신 교수가 10·26 재심 결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지난 25일 서울 역삼동 한 카페에서 김재규의 조카 김성신 교수가 10·26 재심 결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2013년이었다. 새 대통령 박근혜가 취임했다. '박정희' '유신'이란 단어가 흘러 다녔지만 당시만 해도 '최순실'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때가 되레 '패륜아 김재규'라는 낙인을 지울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출판평론가인 김성신 한양대 겸임교수는 어머니이자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인 정숙씨를 설득해 한 주간지와 인터뷰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는 사형 집행 전날 마지막 면회에서 남긴 큰오빠 김재규의 육성을 전했다. "오빠를 위해 기도할게"라는 여동생의 말에 그는 "나 말고 근혜를 위해 기도를 해줘. 괜히 나 때문에 고아가 됐으니"라 대답했다.

너희들은 오빠를 패륜아라 부르지만, 그 오빠는 되레 박근혜를 걱정해주고 있었다는 얘길 하고 싶어서였다. 구국봉사단 문제로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의 비리를 모조리 조사하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졌다지만, 그렇기에 김재규는 어린 박근혜의 앞날을 더욱 걱정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12년. 공교롭게도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계엄과 내란 혐의로 나라 안팎이 한창 시끄러운 지난 19일 서울고법은 김재규 내란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아 죽인 10·26사태가 '내란목적살인'이자 '내란수괴미수'에 해당하는지 공개 법정에서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다는 의미다. 결과에 따라서는 '내란'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으로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김재규 사형 직전에도 "근혜 위해 기도해달라"

재심 청구 작업을 진행해온 김 교수를 지난 25일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이 또한 공교롭게도 내란수괴 혐의로 기소된 윤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서 최후 진술을 하던 날이었다.

-재심 청구 5년 만에 받아들여졌다.

"10·26 이후 사형이 확정된 게 1980년 5월 20일, 집행된 게 24일이었다. 2020년 마흔 번째 기일을 맞이해 재심을 청구했다. 마침 그즈음 김재규 재판을 사실상 배후 조종했던 보안사 요원들의 육성이 기록된 녹취록이 세상에 나왔다. 그냥 내면 기각될 가능성이 커서 그걸 근거로 했다."

-어머니가 셋째 여동생인데 재심에 나섰다.(김재규 밑으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다섯, 막내 남동생 하나 해서 모두 3남 5녀다.)

"굳이 우리를 드러내야 하느냐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10·26사태 자체가 워낙 큰 사건이기도 했고, 우호적인 분들도 물론 계시지만 반감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으니 아무래도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워하시는 게 컸다."

1979년 11월 7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격사건 현장검증에서 김재규(오른쪽 첫 번째) 전 중앙정보부장이 총 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9년 11월 7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격사건 현장검증에서 김재규(오른쪽 첫 번째) 전 중앙정보부장이 총 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3년 어머니의 인터뷰가 유족의 첫 인터뷰다. 그 이전에라도 기회가 있었을 법한데.

"민주화가 되고 김영삼에 이어 김대중 정부가 있었지만 외연 확장을 위해서라도 박정희 문제는 굳이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또 '5·18 광주'를 한국 민주주의의 기점으로 삼고 싶어하기도 했고. 유족들 입장에서도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박근혜 정권이 출범했을 때 '나라에는 불행이겠지만 우리 집안으로선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라엔 불행이라고?

"우리 집안 사람들이야 박근혜와 그 주변 사람들이 어떤 수준인지 대충 알고 있었으니까. 폐쇄적이고 고집 세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박근혜 때문에 박정희, 유신, 10·26이 다시 불려 나온다면 '김재규 재평가'의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어머니를 설득해 언론과 인터뷰하도록 했다."


박근혜 정부는 '김재규 재평가' 기회였다

-박근혜 정부 때가 더 위험했던 거 아닌가.

"언제는 우리가 안 위험하게 살았겠나. 하하하. 평생 숨죽여 살았는데 그렇게 언론 인터뷰도 하고 연세가 여든이 넘어가면서 되레 용감해지시면서 재심도 결심하신 것 같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래도 오빠를 위해 내가 뭔가를 했다' 평생에 그런 거 하나쯤은 남기고 싶어하신 것 같다."

-재심 인용 결정 때 어머니가 많이 기뻐하셨겠다.

"재심은 당사자의 부인, 자식, 형제 정도만 낼 수 있다. 어머니가 동생 자격으로 재심 청구인이 됐다. 다른 이모들은 응원은 하면서도 '올케언니(김재규 부인)가 내켜하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말하긴 꺼려 한다. 대신 우리 어머니가 나서신 거다. 어머니는 '이제 하늘나라에서 오빠를 봐도 할 말이 생겼다, 볼 낯이 생겼다'며 펄쩍펄쩍 뛸 정도로 엄청 좋아하셨다."

1975년 구국봉사단 활동 시절 박근혜(오른쪽) 전 대통령과 최순실. 뉴스타파 캡처

1975년 구국봉사단 활동 시절 박근혜(오른쪽) 전 대통령과 최순실. 뉴스타파 캡처


-김재규의 부인, 딸과 상의했나.

"그러지는 않았다. 사실 그걸 상의하고 허락받고 할 단계도 지났다. 그렇다고 사이가 안 좋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나름대론 화목한 집안이다. 하하하. 이번 재심에 대해 '내키지는 않지만 동생네들이 알아서 하는 거니까 말릴 수는 없다'라 하셨다고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또 한 가지는 시간이 얼마 없다. 이번엔 재심 인용은 5년 걸렸지만 최장 8년까지 걸린다고 들었다. 일단 재심이 받아들여지면 재판은 진행되지만 그 전 단계에서 청구인이 돌아가시면 기각된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 연세가 올해 86세다. 건강하시지만 일단 재심을 시작하는 게 중요했다."

10·26 직후 보안사(현 방첩사) 서빙고분실로 끌려간 김재규는 각목으로 두들겨 맞고 전기고문을 당했다. 법원이 재심 청구를 인용하면서 이 부분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재심 청구 사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비상계엄 선포 전이었는데 민간인 김재규를 보안사가 나서서 수사하고 군사재판을 받게 했다는 점, 재판 과정 내내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요원들이 사실상 재판을 지휘했다는 점, 6개월 만에 3심 재판이 다 끝나고 확정 판결 4일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는 점 등을 문제 삼았다.


김재규는 권력찬탈을 노린 게 아니었다

-여러 사유 중 고문과 폭행 부분만 인용 사유로 들었다.

"재심 과정에서 여러 주장을 했는데 법원이 딱 하나의 이유만 들었기에 나도 좀 이상했다. 그래서 주변 법조인에게 물어봤더니 '기존 재심 인용 사유 중 그게 제일 많고, 따라서 법원이 보기엔 가장 확실한 이유 하나를 내세운 거다'라고 말씀해주시더라. 법원도 이 사건을 다시 봐야 한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나머지 사유들이야 재심 법정에서 다루면 된다."

-내란목적 살인 등에서 무죄를 받는 게 목표인가.

"법리적으로 따지면 민간인을 군인들이 재판한 것까지 문제 삼을 경우 재판 자체가 아예 무효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를 죽인 사실, 그 자체까지 없어질 순 없다. 다만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퍼트린 '차지철과 경쟁하다 뒤처지자 자기가 대통령이 되려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건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재규를 모델로 한 김규평 역할을 맡은 배우 이병헌. 쇼박스 제공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재규를 모델로 한 김규평 역할을 맡은 배우 이병헌. 쇼박스 제공


-그러면 10·26은 어떻게 봐야 하나.

"너무 큰 사건이라 어떤 심오하고 깊은 이유를 찾아내려다 보니 꼬이는 거다. 우리 유족들이 보기엔 단순하다. 당시 부마사태 현장을 둘러보고 온 사람 입장에서 '이러다 진짜 군부대 투입해서 100만 명 죽이려 들 수도 있겠다' 걱정한 것이다. 그다음엔 당연히 '박정희 하나만 없어지면 100만 명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았겠나."

10·26을 다룬, 최근 가장 대중적 작품은 배우 이병헌이 김재규 역을 맡은 2020년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영화다 보니 실제와 다른 설정도 있다. 가령 김재규는 박정희와 '5·16 혁명 동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여덟 살 차이 나는, 아주 아끼는 막냇동생 같은 경북 구미 출신 후배'에 더 가깝다. 그리고 차지철과의 갈등 관계 또한 과장됐다. "김재규에게 차지철은 요즘 말로 '아웃 오브 안중'에 가까웠다"는 게 유족들 시각이다. '차지철과 갈등' '5·16 혁명의 대의' 같은 건 영화적 설정이란 얘기다.


판단력에 한계가 온 박정희에게 닥친 부마사태

-내란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 어느 분은 '내란이라기엔 너무 허술하고, 우발적이라 보기엔 너무 계획적이다'라고 표현하시던데 딱 그 말씀 그대로다. 유신 독재에다 본인의 술과 여자 문제, 구국봉사단 문제를 봤을 때 이미 판단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 와중에 부마사태가 벌어졌는데 차지철은 '탱크로 밀어버리겠다' '100만 정도야 문제없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본인이 직접 부산과 마산을 둘러보니 이건 일반 시민, 주부까지 가세한 민란이었다. 그 위기감이 어떠했겠나."

-그 피를 보느니 박정희를 제거하는 게 낫다?

"지금 윤 대통령을 보면 국회를 제압한 뒤 뭐를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에 반해 김재규는 그런 게 없었다. 아직도 '박정희 제거 뒤 육군본부가 아니라 중정으로 갔어야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거꾸로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 내란을 계획한 게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박정희를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할 것이란 급박함이 강했던 것이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기에 확인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1979년 10월 16일부터 일주일 정도 진행된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가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10월 16일부터 일주일 정도 진행된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가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윤 대통령 내란 혐의와 관련해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은 국회에 출석해 12·3 비상계엄 실패 이후 2차 계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 계엄을 어떻게든 이어가려던 윤 대통령의 의지, 그리고 사퇴했다지만 여전한 김용현 전 국방장관의 영향력, 이대로 실패하면 결국 내란죄로 처벌받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군 장성들의 이해관계 등을 들었다. 1979년 김재규도 그런 판단을 한 것일까.

-그게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표현인가.

"이쪽은 1명만 죽으면 되지만 저쪽은 100만 명이 죽을 수 있다면, 상식적 판단은 무엇이었을까. 전체적 상황이 점점 박정희 제거 외엔 해법이 안 보이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렇기에 스스로 야수가 되기로 한 거다. 사실 이게 가장 심플한 해석인데 호사가들이 보기엔 너무 심심해보인다. 박정희를 종교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기분 나쁜 해석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꾸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덧붙인다."


재심은 10·26 지지해준 분들에 대한 감사 표시

-연좌제로 인한 고통 같은 건 없었나.

"아예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니다. 직장을 잃거나 사업을 그만뒀다. 이민을 간 분도 있다. 하지만 다른 피해자들처럼 집안이 풍비박산나거나 애들 학교도 못 보낼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게 됐다거나 하는 수준으로 당하진 않았다. 아버지만 해도 공무원은 그만뒀지만 나중에 작은 사업체 하는 것까지 뭐라 그러진 않았다. 막내 외삼촌도 10·26 당시 육사에 있었고 이후 군인으로 살았지만, 대놓고 불이익을 받진 않았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워낙 재빠르고 압도적으로 권력을 장악했으니 무관심했던 것 같다. 그 덕에 우린 잃은 것보다 오히려 얻은 게 많다."

거기엔 비밀도 있다. 10·26 직후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강신옥 변호사를 중심으로 변호인단이 꾸려졌는데, 이들이 김재규의 뜻에 공감하면서 자꾸 덩치를 불려나간 게 화근이 됐다. 보안사는 바로 아래 동생 항규씨를 잡아다 고문하면서 '네 형에게 말해 변호인단을 해체하지 않으면 형제자매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협박했다. 이후 강신옥 변호사가 해촉되고 국선으로 안동일 변호사가 선임됐다. 강 변호사도 2020년 재심청구 때가 돼서야 자신이 해촉된 이런 사연을 알게 됐다고 한다.

1980년 1월 28일 법정에 출석한 김재규(왼쪽 두 번째).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 1월 28일 법정에 출석한 김재규(왼쪽 두 번째). 한국일보 자료사진


-오히려 얻은 게 많다?

"그렇다. 우리는 40년 넘게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살았다. 10·26 이후 학창시절 선생님을 비롯, 여러 어른들이 '네가 누군지 안다' '외삼촌 되게 훌륭하신 분이다'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도 된다' 같은 격려의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고. 10·26이라면 사람들은 박정희 장례식 때 길가에 나와 목 놓아 울던 사람들의 스케치 화면을 떠올리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살던 곳이 한창 개발 중이었던 잠실 5단지였는데, 거기에 사는 중산층들만 해도 박정희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번 재심청구는 그런 분들에 대한 감사 표시인 셈인가.

"그 사건 때문에 내가 위축됐다기보다는 오히려 평생을 자부심 속에서 살았다. 이건 대단한 은혜이고, 또 세상에 큰 빚을 진 거라 생각한다. 그 시절을 잘 아시는 함세웅 신부님 같은 분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를 만들어서 지난 40년간 김재규 재평가를 요구해왔다. 그 빚을 갚는 길은 그분들의 응원과 지지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재심 법정을 통해 재확인시켜드리는 일이라 생각했다. 제가 설득하는 과정에서 어머니도 그 부분에 제일 크게 공감하셨다."


사육신 복권에 200년, 역사적 평가란 그런 것

재심 청구 때 김 교수는 '유족 입장문'에다 "유족이 이 재심 신청을 통해서 구하고자 하는 바는 판결이기 보다는 역사입니다"라고 썼다. 억울하다, 분하다가 아니다. 10·26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어떤 의미인지 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는 얘기다.

-재심이 권력암투설, 미국 배후설 같은 오랜 이야기들을 뒤집을 수 있을까.

"저나 유족의 목표야 김재규의 행위가 한국의 민주주의에 그래도 일정 정도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재심에서 이긴다 한들 한순간에 사람들 생각이 바뀌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김재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길게 봐서 150년에서 200년 정도 걸릴 것이라 본다."

2020년 재심 신청 당시 김재규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가 재심 청구의 취지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2020년 재심 신청 당시 김재규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가 재심 청구의 취지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너무 먼 미래인데.

"한동안 사육신을 관심 있게 봤다. 세조 손에 죽은 그들이 충신으로 복권되는 건 숙종 때다. 딱 235년 만이었다. 사육신이 그렇게 부활할 수 있었던 건 생육신 남효온이 '육신전'이란 기록을 남겨서다. 마찬가지로 200년 뒤 10·26은 어떤 평가를 받을까. 재심은 그 기록을 남겨두기 위한 밑작업이다."

-출판 쪽 일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인가.

"그렇게 볼 수 있다. 원래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을 하면서 기록의 엄중함을 이해하게 됐달까. 지금 왈가왈부하는 목소리들이 모두 사라진 미래에 10·26과 김재규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나도 궁금해진다."


조태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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