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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의 달그림자를 읊은 뜻

입력
2025.03.10 04:30
27면

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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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배석판사 이시다 가즈토는 판결문 작성을 앞두고 고심에 빠졌다. 이 재판은 1935년 시작해 2년이 흘러 있었다. 그런데 재판 전 예심에서는 자백했던 피고인들이 모두 결백을 주장하고 나섰다. 고심은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한 회사의 주식을 둘러싼 독직과 배임 사건이지만, 속으로는 배후에 있는 보수 우익 세력이 일으킨 정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로 치닫는 우익은 이에 저항하는 내각을 붕괴시키는 데 이 사건을 이용했다.

16명의 피고인 가운데 장관과 고위 관리만 절반가량 포함돼 있었다. 우익의 사주를 받아 검찰은 210일 동안이나 강압적 수사를 펼쳤다. 그 와중에 수상은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내각이 무너졌으니 우익으로서는 일단 소기의 목적을 이룬 셈이었다. 내친김에 재판까지 이기고자 했으나, 범죄의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이시다는 무죄를 직감했다. 그러나 군국주의의 총칼이 공정한 재판을 그냥 놔둘 것 같지 않았다.

재판부는 고심 끝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제 총칼로 시비 걸지 못할 판결문이 필요했다. 그 임무가 이시다에게 떨어졌다. "마치 물속의 달그림자를 움켜잡아 올리려 하는 것과 같다. 이 건은 범죄의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물속의 달그림자란 허구의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일본 법조계에서 총칼 앞에 의연했던 사법의 명문이 그렇게 나왔다.

사실 이 대목은 불가(佛家)에서 두루 쓰이는 공(空)과 색(色)의 변증법에 그 연원이 있어 보인다. 송나라 초기의 고승 조심(祖心)이 그의 스승 혜남(慧南)의 영전에 쓴 조시에, "뿔 셋 달린 기린이 바다로 들어가고(三角麒麟入海中)/휑한 하늘의 조각달만 물결 따라 일렁이네(空餘片月波心出)"라는 구절이 있다. 기린은 자신의 스승을 가리키고, 오로지 세상에 통하기로 한 분밖에 없었는데, 그런 스승은 세상을 떠난 뒤 물결에 비춘 달빛처럼 남았을 따름이다. 있으나 없는 존재를 그리워하는 절절한 심정이 그려진다. 혜남은 임제종 황룡파(黃龍派)의 시조이고 조심은 그 밑에서 심인(心印)을 얻었다.

임제종은 일찍 일본에 전파돼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다. 조심의 '물결 따라 일렁이는 조각달'은 화두처럼 신도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이고, 이시다의 귀에도 남아 '물속의 달그림자 움켜잡는' 이미지로 변주되어 나왔으리라 짐작된다. 거기에는 군국주의자의 흑심을 제압하는 굳센 마음이 벼려 있었다. 그로부터 32년 뒤, 1969년 이시다는 일본 최고재판소 장관이 되었다. 우리로 치면 대법원장이다.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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