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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운명을 바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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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7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모습. 뉴스1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은 광둥성의 외딴 시골 출신이다. 그는 주위 어른들에게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학교 공부 따위 집어치우고 일찌감치 돈이나 벌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부를 계속했고, 결국 세계를 놀라게 했다. 량원평의 성공으로 중국 사회에는 "공부가 운명을 바꾼다(讀書改變命運)"라는 격언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공부가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오랜 믿음이다. 《고문진보》라는 책이 있다. 중국 역대 명문장을 모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필독서였다. 이 책의 첫머리에는 송나라 진종 황제의 '권학문'이 실려 있다. 선비들에게 공부를 권유하는 글이다.
"부자 되려고 좋은 땅 살 필요 없네. 책 속에 수많은 곡식이 있으니까. 편히 살려고 큰 집 지을 필요 없네. 책 속에 황금으로 만든 집이 있으니까. 문을 나서도 따르는 사람 없다고 한스러워 말라. 책 속에 수레와 말이 빼곡하니까. 중매 없어 장가 못 간다고 한스러워 말라. 책 속에 아리따운 여인이 있으니까. 남아가 평생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창가에서 경전을 부지런히 읽어라." 공부해서 출세하면 두둑한 녹봉을 받으며 화려한 집에서 하인들을 거느리고 미모의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진종 황제가 재위하던 송나라 초기는 과거제도의 정착기다. 귀족이 관직을 세습하던 이전과 달리, 능력만 있으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과거제도의 시행은 혁명과 같았다.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나 공부하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책을 읽어라! 녹봉과 저택, 하인과 미녀가 모두 책 속에 있다!
노골적으로 욕망을 자극하는 권학문을 불편해 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퇴계는 권학문이 공부하는 사람을 부귀영화로 꼬드긴다며 제자들이 읽지 못하게 먹칠을 해버렸다. 권춘란은 권학문을 읽으면 출세하기 전부터 마음 속에 탐욕이 싹트고, 출세한 뒤에는 돈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결국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좀먹을 것이라 우려했다. 그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성현의 말씀을 줄줄 외웠지만 그것은 세속적 성공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들의 행동은 성현의 말씀과 거리가 멀었다.
공부가 운명을 바꾼다는 믿음은 지금도 건재하다. 높은 교육열과 치열한 입시경쟁이 증명한다. 그 믿음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장과 번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학벌주의와 입시지옥,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특권의식,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만능주의다. 공부가 운명을 바꾼다는 믿음이 비뚤어진 욕망으로 병든 사회를 만들었다. 이제는 운명을 바꾸는 공부보다 병든 사회를 치료하는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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